80세 축하연 참관기

1977년 독일연수 당시 지도교수인 도이치 교수의 80회 생신을 맞아, 80회 생신 기념논문집 출간 및 생신축하모임을 위해 2009년 세계 각국의 제자들이 괴팅엔으로 모였다. 생신축하라고는 하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학자들이라, 5일 동안 오전, 오후 내내 세미나를 하고, 저녁시간에는 축하만찬을 가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날 저녁만찬은, 외국에서 온 제자들을 교수님의 집으로 초대하여 이루어졌고, 마지막 날 만찬은, 시내의 가장 멋진 식당을 통째로 빌려, 100명 남짓의 동료, 친구, 제자들 모두를 초대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 사이의 3일은 희망자들이 자원하여 하루씩 저녁식사를 주최하였는데, 그중의 하루를 우리 한국팀이 부담키로 하였다. 장소는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유서 깊은 레스토랑으로 정하였다. 우리들 일행이 많았기에 다른 손님은 받지 못하고, 우리들만의 모임이 되었다. 그들의 관행에 따라, 식전주로 식욕을 북돋우면서 환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고, 이어서 정식만찬을 시작하기 전에, 식사를 초대한 주최 측에서 간단한 스피치를 할 순서가 마련되었다.
10분 남짓의 짧은 스피치이지만, 형식적인 미사여구만을 나열해서는, 국제적인 수준에 미흡할 것 같았다. 32년 전인 1977년 평생 처음 외국에 나와, 모든 것이 서투를 때에 지도해 주고, 안내해 준 고마움과,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나라를 여러 번 방문하고, 우리나라 법조인들에게 연수의 기회를 마련해 준 배려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나아가, 연구실에서 또는 집으로 초대해,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과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느끼게 해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담아, 출국하기 오래전부터 나름의 우리말 원고를 우선 작성하고, 여러 번에 걸쳐 수정을 거듭하였다. 다음은 이 원고를 독일어로 옮기는 작업이 남았다. 내 나름으로, 스스로 번역을 해 볼까도 생각하였으나, 그래서는 아무래도 우리식의 독일어가 될 것 같아, 어린 시절부터 독일에서 성장하여 독일의 법과대학에서 수학 중인 한국인인 지인에게 독일어다운 어투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교수와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추억담, 개인적인 일화, 늦은 밤 세미나실에서의 열띤 토론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다보니, 원고가 꽤 길어졌다.
나머지는,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이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하게 하려면, 작성된 원고를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방식도 생각하였으나, 그래서는 너무 형식적이고, 진심을 전달하기에 부족할 듯하여 원고없이 해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원고를 암기해서 자연스럽게 말을 풀어가야하는 부담이 생겼다. 원래 암기는 자신이 없는데다가,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적절한 유머와 함께, 10여 분 동안 흥미롭게 이야기를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실감하였다.
여행기간 동안 내내 틈틈이 암기를 반복하여, 내 자신의 말이 되도록 노력하였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비상대책으로, 이야기 도중 말이 막히면, 꺼내 볼 수 있도록 타자한 원고를 안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있기로 하였다. 혹시라도 하여 식전주도 자제하였다.
이윽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풍 레스토랑이 흔히 그러하듯이 모두 부분조명으로 되어 있어서, 분위기는 우아하고 아늑하였으나, 안주머니에 있는 원고를 꺼내더라도, 어두워서 보고 읽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순간 걱정이 앞서고, ‘차라리 원고를 큰 글씨로 타자하여 읽어버리고 말 것을’이라고 후회하였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들을 그대로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자리인 만큼, 시간이 가면서 차분하게 안정되게 말이 이어졌다. 교수님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옛날의 추억에 잠겨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1977년 당시 석사과정을 위하여 독일어로 작성하여 한부 증정해 드렸던 논문의 내용까지 기억하고 언급해 주셔서, 그 분의 기억력과 나에 대한 관심에 놀라면서 감사하였다.
교수님은 다음해인 2010년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만 금년에도 한국방문을 계획하셨으나, 갑작스러운 건강문제로 방문이 연기되었다. 당시 30세의 새내기 판사였던 나를, 그리고 당시 막 시작하였던 우리 법관들의 독일연수를 크게 도와주신 데에 깊이 감사드리고, 오랫동안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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