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첫 울음을 울 때 엄마의 가슴에 얹혀지는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감격에 겨워한다. 그때의 감동과 감격을 생각하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하는 모든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전신의 피부가 아직 물기에 젖어서 쭈글쭈글한 아기가 무엇이 그리 예쁘다고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 볼 수 없는 아이를 놓고서 엄마의 어디를 닮았고 아빠의 어디를 닮았다며 찾기를 하는지, 그냥 예쁘고 신기한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이다.
아이가 조금 더 자라서 옹알이를 하기 시작하면 부모는 또 한번 거짓말을 한다. 입을 붙였다가 떼면서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의 엄마는 ‘엄마’라고 했다고 하고 아빠는 ‘아빠’라고 했다고 서로 우긴다. 아이는 그저 입술을 붙였다 떼는 소리를 낼 뿐이었는데도 그것이 신기하고 대견하기 때문이리라.
아이가 말을 배우고 나서 어디가 아프다고 의사표시를 하시 시작할 때면 아이가 의사표시를 한다는 자체에서 어찌 그리 안심이 되던지, 까닭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놓고 배가 아픈지 머리가 아픈지 어디를 다쳤는지 점을 치지 않아도 되는 구나라는 생각에 안심을 한다.
부모는 아기의 우는 소리만 들어도 배가 고파 우는지 불편해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를 점치는 반 의사 겸 반 점쟁이가 된다.
아이가 자라서 유치원에 들어가서 목도 없는 사람을 그려서 팔이 얼굴에 가서 붙어있어도 자기 아이가 천재 화가라도 된 듯이 기뻐하는 것이 우리 부모다. 숫자를 세면서 한 자리 숫자를 암산으로 계산해내는 것을 보면서도 혹시 내 아이가 수학에 특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를 하기도 한다.
아이가 장남감에 욕심이 생겨서 비싼 로봇을 사달라고 조를 나이가 되면, 부모는 아이에게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도 절제해야 할 때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아이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 아이에게 ‘이제 네가 자기 욕구를 채워가기를 배우는구나’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신통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넘어가면서, 아이가 사춘기 초기 증세로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고 반항을 하면서, 가끔은 엄마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면서 ‘네가 벌써 엄마로부터 독립하려고 홀로서기 준비를 하는구나’ 하는 신통하고 대견한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떠날 준비를 하는 아이에게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내아이들을 이 무렵이 되면 엄마보다는 이미 키가 한뼘은 커져있고, 아빠를 이기는 것을 최대한의 목표로 삼기라도 하는 듯이 팔씨름도 하자고 하고, 몸무게를 비교하자고도 한다. 간혹은 네가 감히 나를 이기려하느냐고 질투하는 아빠도 있다고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고집하더라도, 부모는 다섯 살까지 아이가 보내준 순수한 미소를 통해서 모든 효도를 다 받았다고 생각하고 참으라고 했던가.
오늘 아침 중학생이 되는 둘째아들이 출근하는 엄마에게 “엄마 꼭 국회의원이 되셔서 하시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세요”라고 격려하는 말을 들으면서 집을 나올 때, 이제는 내가 이 아이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준비를 할 때가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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