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싫어하는 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사는 세상”

2012년 1월 30일 경포대의 한 호텔에서 열린 강원지방변호사회 정기총회에 대한변협 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택수 강원회 회장이 연단에 올라가 이런 말로 개회사를 시작했다.
“석궁사건을 영화로 만든 ‘부러진 화살’을 단체관람하고 나서 실망감과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법원과 검찰이 조롱당하는 걸 보고 관객들이 통쾌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법조 안에서 27년 동안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생활해 왔구나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법조계에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법조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에 꼭 서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형식이 아닌 진정이 담긴 말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우리 변호사들은 앞으로 재판방청객 앞에서 서로 대립되는 입장이라도 서로 부딪치고 섭섭한 감정을 갖는 일을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겁니다. 재판장 중에 더러 변호사를 아래로 보고 깔아뭉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건 결국 법조계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에는 아직도 관료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어서 결산을 승인하기 위한 감사보고가 있었다. 감사가 연단으로 올라와 말하기 시작했다.
“협회에서 폰뱅킹을 하지 않고 직접 직원이 움직이면서 인력과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시정됐으면 합니다. 회장이 협회비로 개인명함을 찍은 비용이 61만원으로 되어 있는데 감사로서 그 비용의 환수를 요구합니다. 변호사회에 사무국장이 있는데 그 밑에 왜 여직원을 두 명이나 두어야 하는지 회장께서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변호사회에서 법원이나 검찰과 간담회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 몇 사람이 협회 돈 25만원으로 양주 발렌타인을 마셨는데 임원이 아닌 변호사도 섞여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 외 법조세미나에 참석한 연주단의 공연비용 100만원과 뒤풀이 식대비용이 적정한지에 대해 감사로서 소명을 구했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회원은 잘 쓸 것이라고 생각하고 회비를 납부합니다. 그냥 박수치고 통과시키는 관습은 이제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립니다.”
깐깐한 감사 보고였다. 그 외 항목별 감사보고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했다. 다른 변호사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회장의 얼굴이 붉어지고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택수 강원회 회장은 초연한 얼굴이었다. 이택수 회장이 답변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폰뱅킹을 활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명함을 찍는데 든 61만원은 제가 이미 반납한 바 있습니다. 사무실에 여직원을 두명 둔 이유는 한 사람이 밖으로 일을 나가면 전화 받을 사람도 없고, 일은 많은데 사무실이 텅텅 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직원을 한명 더 두게 된 겁니다.”
강원회의 연간수입은 1억4000만원 가량이었다. 수백 억의 수입이 있는 서울지방변호사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투명한 예산관리였다. 회의가 끝나자 신나는 바둑대회가 열렸다. 나는 커피숍에서 이택수 강원회 회장을 만나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원회 소속 변호사들이 다른 곳보다 더 투명하게 운영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지금 춘천의 변호사 상황을 보면 반정도가 사무실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젊은 변호사 중에는 나보고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야 그들의 수임건수가 올라간다는 거죠. 그래주고 싶지만 저도 아직 여력이 있는데 그만둘 수도 없고요. 변호사회의 모습이 과거와는 다르게 정화되어 있는 곳이 여기 강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일부 변호사들이 브로커를 써서 물을 흐리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은 몇몇 변호사가 스스로 나서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질서를 바로 잡고 있습니다. 진흙탕을 만드는 변호사를 찾아 무슨 수를 쓰든지 그렇게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헌신 덕분에 변호사 사회가 깨끗해졌습니다.”
“회장으로 명함을 찍은 값까지 돌려주면 기분이 상하지 않습니까?”
“내 맘에 드는 사람들보다 나를 싫어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게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지역 사람이 아니고 변호사회 회장을 연임한 탓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전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경지에 올라간 듯한 인내의 리더십 같았다.
“영화나 데모로 사법부를 공격하는 걸 어떻게 보십니까?”
기조연설에서 그는 원인을 말하지는 않았다. “판사들 중에는 아직도 자기 위에는 사람이 없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결정에 운명이 좌우되니까요. 콧대가 높고 까부는 겁니다. 욕을 해도 반응을 하지 않고 말이죠. 그러다 사법부에 위기가 온 겁니다. 국민신뢰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권위를 인정해 줬지만 이제부터 언론에서 판결문을 가지고 하나하나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난감해 지겠죠. 항소심까지 사실심도 굉장히 잘못된 게 많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심리불속행제도를 만들어 아예 재판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판결문을 왜 완전히 공개하지 않습니까? 사법부의 하자를 프라이버시니 뭐니 하는 명분으로 숨기려하면 안 됩니다. 비판하게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판례평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반의 비판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의 표현이 신랄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요즈음의 젊은 법관들의 소신은 높이 평가해 줘야 합니다. 사회저명인사라고 특별대접하지 않고 공평하게 처리합니다. 상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박봉에도 구속영장 발부를 멋있게 하는 걸 보기도 합니다. 사법부의 개혁은 젊은 법관들이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지방변호사들의 어제와 오늘을 알고 싶어 물었다.
“어떻게 27년 전 춘천에서 변호사를 하게 됐죠?”
“저는 원래 충청도 음성의 방앗간 집 아들입니다. 그럭저럭 먹고 살 만했죠. 서울 덕수중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로 바로 대학을 가려고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러다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죠.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2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우연히 춘천으로 내려왔다가 호반도시의 포근함에 반해서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법률사무소를 처음 열었을 때 얘기를 해 주시죠.”
“처음에 춘천을 내려왔을 때는 법원은 논바닥 가운데 혼자 휑뎅그렁하게 서 있었고 주위에 아무 건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내에 조그맣게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개업비용이 없어서 교사인 아내의 적금을 해약했죠. 변호사라야 춘천에 모두 네 명 정도였는데 그 중 두 분은 육십이 넘으신 분이었죠. 사무실을 열었는데 2주 동안 상담하려고 찾아온 사람조차 없어 불안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의 휴대전화가 부웅하고 진동을 했다. 바둑대회에 빨리 올라오라는 전화였다. 그가 계속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오게 됐는데 처음에는 상담을 하면서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무조건 열심히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점점 사건이 늘고 서울 지역보다는 변호사 수가 적어서인지 훨씬 빨리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됐습니다.”
“그 시절 지방의 법원이나 검찰청의 풍토가 어땠죠?”
“지금의 정화된 시각에서 보면 솔직히 27년 전 그때 엉망인 면이 많았죠. 지역사회라 검사들이 상당한 권력을 부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무리한 기소도 많았습니다. 변호사로서는 그럴 경우 상대적으로 무죄판결을 많이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면 검찰청에서 그 보복으로 회식 때가 되면 폭탄주로 미운 변호사를 괴롭혔습니다. 글라스에 양주를 가득 부어놓고 그걸 한번에 다 마시라는 겁니다. 죽는 거죠. 또 어떤 검사는 한번 밉다고 찍으면 놔주지를 않는 거예요. 한 사건이 무혐의가 되면 수사관을 시켜 온통 그 주변을 다 조사해서 감옥에 갈 때까지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걸 봤습니다. 권력의 횡포였죠.”
“그 시절 법원은 어땠습니까?”
“재판이 끝나면 변호사 몇 명이 조를 짜서 판사들 회식을 시켜주고 2차까지 접대해야 했습니다. 판사들이 변론보다 남들이 하는 귓속말에 더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귀가 얇은 거죠. 한번은 제가 산림훼손으로 약식기소가 제기된 사건을 맡았는데 판사가 갑자기 법정구속을 시킨 겁니다. 당사자들이 사무실에 와서 난리를 쳐서 돈을 다 돌려주고 곤욕을 치렀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담당 판사가 나보고 ‘이 변호사님이 다른 사람한테 내 정신연령이 낮다고 흉봤다면서요?’하고 확인하더라고요. 내 의뢰인이 왜 법정구속을 당했는지 그제야 알았죠.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감정적인 판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주문이 나왔을 때 담당판사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초보 변호사입니다. 대부분의 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오해가 많을 뿐이죠.”
“지역 변호사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현직 판사로 있는 사람들은 재야 변호사사회를 진흙탕쯤으로 생각했었죠. 변호사를 개업하면 흙탕물에 빠지는 것처럼 인식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건 바로 그런 재조출신 변호사들이었습니다. 의정부 변호사비리나 대전 변호사비리 그리고 춘천 변호사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주인공들은 전부 재조에서 점잖은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입니다. 또 변호사는 겸손해야 하는데 판사를 하던 사람들 중에는 변호사 개업을 해도 자기가 판사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정에서 후배판사인 재판장을 훈계하는 모습도 더러 봤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요.”
“27년간 해오시면서 변호사는 뭐라고 정의하십니까?”
“저는 변호사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가장 쉽게 망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돈 때문에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거죠. 변호사는 아무리 벌어도 갑부가 될 수 없고 못 벌어도 굶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하라고 하면 법정에서 싸우는 동료변호사에게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과 힘의 10퍼센트 정도는 사회에 환원해야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결코 간판만 보고 오지는 않습니다.”
“주변에서는 빌딩도 가지고 있는 부자변호사라는 평가가 있는데 어떻습니까?”
“저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27년 전 여기 강원도에 와서 틈틈이 은행에 저축하기보다는 작은 땅들을 사두었습니다. 강원도의 개발붐으로 그 땅들이 수십 배 가격이 오르고 부자가 되는 행운을 누린 사람입니다. 행운아로서 해야 할 의무가 뭔지 항상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 12년 동안 재소자들을 위해 봉사한 실적이 있었다. 면회 오는 가족이 없는 고독한 사람에게 사식이나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했다.
“형사사건에서 무죄를 많이 받아냈는데 그 비결은 뭡니까?”
“변호사가 무죄를 많이 받아내려면 눈치 없고 미련한 놈이 돼야 합니다. 판검사 눈치를 보면 무죄를 받아낼 수가 없어요. 법에서 배울 때는 무죄추정의 원칙이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소만 되면 유죄로 추정하지 않습니까? 변호사는 기록을 꼼꼼히 살펴서 의심나는 사항을 따져봐야죠. 제가 맡았던 사건 중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고 기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증언대에 머리를 파묻고 ‘아빠가 범인이야’라고 통곡을 한 게 결정적인 증거였죠. 죄가 인정되면 사형감이었어요. 그 아이를 법정에 다시 불러놓고 7시간 이상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적이 있죠. 결국 담당 형사가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다주고 세뇌를 시켜 가짜편지도 쓰게 하고 법정에서 허위진술을 시켰던 걸 알아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검사는 잘못 기소하더라도 무죄에 대해 너무 민감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진실은 외면한 채 무죄판결을 안 받으려고 애쓰는 걸 보면 저 사람이 과연 국민의 공복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면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정의는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되선 안 됩니다. 변호사는 무죄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부터는 무제한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는 노련한 변호사였다.
“변호사의 고수가 되는 비결을 한마디 하시죠.”
“변호사라면 변호사 한 가지 일에만 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났다가 헤어질 때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이 끝난 다음에도 좋은 인상을 줘야 합니다. 진짜 고수라면 패소한 당사자가 다른 의뢰인의 손을 잡고 사건을 맡기러 와야 하겠죠.”
“이제 남은 시간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저는 원래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틈틈이 클래식 기타와 색소폰을 배웠고요. 지금이라도 음대에 편입해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고 싶어요.”
변호사 바둑대회에 오라는 전화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태백선을 탈 시간이 거의 다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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