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스럽지 못한 판결’의 유형

전국의 법원에서 매일 수많은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다. 그 판결의 ‘대부분’이, ‘적어도 결론에 있어서만은’ 정의에 부합하고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한다. 더욱이 판결의 내용(결론)에 대하여 그 잘잘못을 거론하는 것은 지극히 신중하여야 하고, 또한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수년 혹은 수십 년의 기간을 놓고 예전의 판결들을 분석해 보면, 사후적이지만 그 잘못이 두드러지거나 분명해 보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반성적 차원에서 이와 같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판결들은 ‘어떠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로 가장 전형적인 경우가 전시와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내려진 판결들이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대법원이 ‘일본인들의 격리수용’을 인정하였고, 얼마 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9·11테러범에 대한 가혹행위’를 인용하였으며, 나치시대에 독일법원판결들이 그러하였고, 유신시대 및 군사정권 시절 우리 법원의 판결들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법관의 태도는 크게 2가지일 수 있다.
하나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라는 법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희생을 각오’하고(실제로 대부분 희생되었다) 기본권 수호에 앞장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용기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실제 이념적으로 국가위기 극복에 공감하여, 국익수호의 판결을 내리는 경우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여기에서 다툴 문제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상황이 소멸된 이후 우리가 취할 태도이다. 하나는 국가우선주의의 태도를 철저히 반성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거나(독일의 경우가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특수상황을 헌법적으로도 수긍하여 ‘정의의 상대성’을 고집하는 것이다(미국의 경우가 그러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경우는 어느 쪽에도 철저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법원이 판결을 내리는데 ‘역사에 의존’하여 시대의 변화에 눈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원이 ‘이러한 관행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과거에 얽매어 있는 것이다. 노예제도를 인정한 미국의 판결들, 여성참정권을 부정한 외국의 판결들, 여성종중원의 종원자격을 부정했던 판결들이 이러한 예에 해당된다. 법원의 판결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지만, ‘얼마나 적절한 시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가 깨어있는 현명한 법관의 임무이다.
셋째로, 법원의 판결이 맹목적으로 이전의 선(先)판례에 의존하여 그 정당성을 재음미함이 없이 선례에 맹종하는 경우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잘못된 판례가 이에 의존한 수백 개의 잘못된 판결을 낳게 되는 것이다. ‘집행유예기간 중에는 어떤 경우에도 다시 집행유예를 할 수 없다’는 예전의 대법원 판결 및 임기가 있는 해직 교수의 경우 ‘소송중 임기가 경과되면, 소의 이익이 무조건 상실된다’는 종전 판례 등이 그 예이다. 위 판례들은 다행히 후에 모두 변경되었지만, ‘법원의 판단미숙’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았던 종전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을 금할 수 없다.
넷째로, 결국은 ‘법관의 용기부족’의 문제로 귀결되지만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사회분위기’(여론의 압력) 또는 당시 ‘권력기관의 무언의 위세’에 휘둘려 엄벌 또는 중형주의로 나아가는 경우이다. 잠시의 폭풍이 지나가고 평온을 되찾았을 때의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여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민·형사 사건을 막론하고 입증책임분배의 원칙으로 ‘너무 성급히’ 도피하여 자유심증주의의 진면목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이다. 즉, 사안을 철저히 심리하여 자유심증을 적절히 활용하면 사안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경우에도 이를 소홀히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법관의 입장에서는 법률상 하등의 잘못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면, 실체적 진실을 원하는 국민과의 사이에 괴리가 생기고, 사법부 신뢰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부의 목적이 선의에 기인하고’ ‘더 높은 정의를 위하여’라는 명분을 법관은 항상 경계하여야 한다. 정부 공무원이 헌법을 위반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법관이 이를 승인하면 이는 ‘헌법의 원칙’으로 되고 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삶은 뒤돌아 봐야 이해되는데, 거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위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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