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목소리 따르는 정치인 되고파”

적막한 도서실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이나 로스쿨생들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상당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검사 같은 인물이 되어 이름을 날리고 정계로 진출하는 꿈을 먹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성공하는 길도 다양하다. 재벌그룹의 엘리트 변호사로서 회장을 보좌하고 조직을 경영해 본 후에 여의도로 진출하는 코스도 있다. 그런 길을 걷고 있는 모델이 되는 인물을 살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준길 변호사가 그런 유형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검사로 임관되어 대검 중수부에서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했다. 검사시절 CJ그룹에 스카우트 되어 경영전략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현재 대형 로펌인 광장의 파트너로 있으면서 동시에 대한변협의 수석대변인도 맡고 있다. 정준길 변호사는 애벌레인 고시생들의 나비가 되는 꿈을 거의 다 이루었다고 할까? 그는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다 지난해 연말 두 번째 정계도전을 위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2011년 12월 13일 변협 건물 내 소회의실에서 그와 만났다.
“검사가 된 동기는 뭡니까?”
권력지향의 이면엔 대개 사연이 있었다.
“개인주택을 도급받아 짓던 아버지가 공사대금을 받지 못해 건물주와 싸웠죠. 건축주가 아버지를 패고 목을 비틀어 중추신경을 다치게 했어요.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됐죠. 반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건물주와 폭력범은 가벼운 형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우리는 공사대금은 물론이고 아버지 치료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가난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한 서린 어머니가 그때 저보고 검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가난을 어떻게 경험했습니까?”
세대마다 가난의 모습은 상대적이고 형태도 달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복장자율화로 사복을 입어야 하는데 전에 입던 작아진 교복을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학교에서는 혼을 내면서 사복을 입으라고 했어요. 어머니에게서 받은 만 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시장으로 갔었습니다. 살 수 있는 옷은 길바닥에 늘어놓고 파는 것들뿐이어서 그걸 사서 다음날 입고 갔더니 친구들이 놀려대더라고요. 제가 산 싸구려 바지가 옆 부분이 동그랗게 나온 디스코바지였기 때문이었어요. 그렇지만 독하게 공부했습니다. 서울 법대 커트라인에서 한두 점 모자라는 성적으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렇지만 경영학과는 저의 목표가 아니었죠. 재수를 해서 다음해 서울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시절도 고시를 향해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공부를 하는 강행군을 했습니다. 재학 중 합격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사병으로 군에 끌려갔어요. 거기서도 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정기휴가와 포상휴가를 가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아껴두었다가 제대 무렵 36일간의 귀중한 시간을 얻어냈습니다. 휴가 첫날부터 혜화동 독서실에 자리를 잡고 1차시험 공부에 들어갔죠. 그동안 속에 응축한 에너지를 다 뽑아 집중했어요. 1차에 합격을 하고 제대를 하면서 2차까지 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검사가 됐군요?”
가난과 한이 응어리진 그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했다.
“검사가 되어 처음으로 상습적으로 저울눈금을 속여 바나나를 판 상인을 구속했습니다. 검사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제 판단에 의해 형사소추여부와 구속영장청구가 결정되는 거였죠. 2년간 90명을 구속했습니다. 200명을 잡아넣기로 계획을 세웠던 적도 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차출되어 밤과 낮이 뒤바뀌는 생활을 하면서 수사에 전념한 적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소환하면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청구 여부를 결정해야 해서 참 치열하게 싸웠죠. 그리고 나면 또 다른 인물이 소환되어 그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양복과 와이셔츠를 몇 벌씩 사무실에 걸어놓고 갈아입었어요. 잠은 사무실의 야전침대에서 잤죠. 거기서 다시 대검 중앙수사부로 발탁됐습니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위해서였어요. 수사 초기부터 개입해 정치인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도 하고 수사결과 발표를 취합해 정리하는 마지막 일까지 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사표를 던진다.
“잘나가던 검사생활을 그만둔 이유는 뭔가요?”
“일만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가 사십이 됐더군요. 검사로서 앞으로 더 전진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상관인 중수부 과장들을 보았습니다. 그게 십년 후 성공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분들이 전혀 부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력하면 검사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종착역이 검사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일생 직업을 세 번 바꾸지 않으면 비겁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10년 검사생활에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이후의 생활은 타성대로 굴러가는 거죠. 그건 조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거고요. 그 사이 중국유학을 일 년 동안 갔었는데 나라가 굴러가는 건 기업이 외부에서 돈을 벌어 국내에 떨어뜨리면 그걸 분배해서 사는 것이더라고요. 경영을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CJ그룹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룹 회장실의 가장 중요한 파트였고 회장님의 파격적인 배려였습니다. 궤도수정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재벌그룹에서 어떤 일을 했죠?”
“계열사 전체를 돌면서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파악하는 일을 했습니다. 경영이라는 건 법률과는 다르게 제한적 정보를 가지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법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단순하고 단조로웠는데 경영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걸 봤죠.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경영에서 실패의 책임은 명확했습니다. 바로 문책이 됐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재벌그룹 내에서도 신중을 가장해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걸 보기도 했습니다. 실패할 때는 책임이 분명하지만 해야 하는데 못한 일은 공과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죠.”
“그룹에서 구체적으로 맡아 했던 일은 뭡니까?”
“전략구매실장을 했습니다. 식품원료인 밤, 귤, 복숭아, 밀, 쌀, 콩 등을 중국이나 호주에서 사들여오는 일이었죠. 그 외 두부제조라인을 프랑스에서 도입하는 일도 했었습니다. 담당직원 50명을 데리고 일했는데 검사 때 계장 한 사람을 데리고 수사를 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죠. 협력업체 직원들의 유착이나 심한 납품경쟁을 봤습니다. 인간의 리더십이라는 게 예수의 제자들처럼 12명을 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팀장을 통해 일을 시키는 조직 관리를 거기서 배울 수 있었죠.”
“그곳도 그만두셨는데 이유는 뭡니까?”
“막상 가서 보니까 기업의 본질은 사익(私益)이었습니다. 그게 그만두고 자진해서 나온 이유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함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2008년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이 집권하게 됐습니다. 정계로 나가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사진이 들어간 명함을 주민들에게 건네기 시작했어요. 받은 명함을 그 자리에서 바닥에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수모를 참아냈습니다. 낯선 지역민들을 만나 머리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거기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런데 공천을 받는 데 실패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 공이 없었다는 사유였죠.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가 되셨는데 변호사는 뭐라고 정의하십니까?”
“전문가죠. 현실에서는 권력이나 재력과 일반국민 간 힘의 균형이 깨져 있죠. 그걸 동일하게 맞추도록 보조해 주는 게 변호사가 아닌가 합니다. 법원이나 검찰 권력이 권한행사를 잘못해서 국민이 억울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게 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형 로펌에 지분 파트너로 계시는데 로펌에서 그런 변호사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십니까?”
“로펌에서 일하다 보니까 제대로 된 법률서비스는 아무래도 가진 자의 편인 것 같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만 로펌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변호사들이 법률지식을 악용해서 흑백을 바꾸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가 자신이 지켜야 할 한계나 영역을 넘어 사실관계를 바꾸는 경우가 없도록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변호사가 일을 해주는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보시죠?”
“진실을 묵비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거짓말이나 거짓증거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신분이 바뀐 그가 과거 몸담았던 조직을 어떻게 보는지 물어보았다.
“얼마 전 벤츠 승용차와 샤넬 백을 뇌물로 받았다가 구속된 여검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검사들의 자세와 역량이 질적으로 많이 저하된 것 같습니다.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인 이익 차원에서 다루니까 그랜저 검사가 나오고 벤츠 여검사가 탄생하는 겁니다. 검찰이 사회정의와 인권의 주축을 이루어야 하는데 지금은 인권은 없고 공안기능만 비대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치우친 거죠. 검찰조직 전체가 국민 여론의 비판을 받으면서 위상이 추락했습니다. 옛날처럼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 대부분의 검사들이 왜 이 일을 하는지 회의를 느끼게 된 겁니다. 이제는 그냥 아직까지는 좋은 직업이다 라는 정도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찰조직 내부에 있을 때와 밖으로 나와서 검사를 볼 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의 시각을 좀 더 파악하고 싶었다.
“변호사가 되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검사들의 좋지 않은 모습들을 봤습니다.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는 검사, 사명감이 없이 그저 무사안일인 검사, 몇 번을 찾아가 사건을 쳐박아 두지 말고 제발 빨리 처리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검사, 고소인과 피의자, 그리고 변호사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검사들을 보면서 검찰의 사건처리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로 그 반대편이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구요. 변호사가 되어 검찰을 바라보니까 과거 나를 거쳐 간 피의자나 고소인들이 내 결정에 수긍하고 승복했을지 염려가 됩니다.”
그가 잠시 쉬었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노무현 정권시절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 이후 검찰을 놔줬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할 수 있었죠. 어느 정권이나 제일 문제되는 건 대통령 측근 공신들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부패의 원인이 되고 대통령이 힘든 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발목이 잡히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 시절 창업공신의 전부를 일단 자르기로 했습니다. 최도술, 안희정, 이광재가 구속됐었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측근들을 물리치고 바른 정치를 할 발판을 검찰이 만들어 준 셈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탄핵정국이 끝나고 대통령이 돌아오자 측근들을 모두 다시 재등용시켰어요.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 겁니다. 그 이후 과거사 진상규명이니 하는 말이 나오면서 다시 사회가 분열됐죠.”
그의 시각은 독특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대선자금 수사검사로서 정경유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재벌과 권력이 공생을 하는 관계인데요, 재벌은 불구속인 경우가 많았고 정치인은 전부 구속인 쪽이었어요. 재벌들의 말대로 정치권이 요구해서 마지못해 자금을 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습니다. 재벌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돈을 가져다 준 걸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수사할 당시의 목표가 정당 쪽이라 그랬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어떻게 봅니까?”
“그동안의 정치는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대부분 정치지도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리더십이었는데 이제는 국민의 소리를 잘 듣고 정치인이 따라가야 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같이 앞장서서 가겠다는 그런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안철수 현상을 봤습니다. 저 역시 통일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 고심했습니다.”
“보수정당인 집권여당 쪽 후보로 나가면서 그런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까?”
“야당으로 나가면 지지해 주겠는데 여당으로 나가서 그렇게 못하겠다는 친구가 있어요. 진보와 보수는 우리 헌법체계에서 다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를 보고 판단하는 정도의 차이죠. 그런데 보수에 수구가 끼어있고 진보에 혁명세력이 섞여있습니다. 수구와 혁명세력은 모두 관념주의자들입니다. 수구는 겉으로는 원칙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기 이익만 지키자는 것이고 혁명세력은 자기들 생각으로 세상을 짜 맞추자는 거죠. 수구와 혁명세력이 중간층을 흔들어버리니까 사회가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저는 여당으로 들어가 그런 수구세력과 싸우는 게 목표입니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의 몸에서 수시로 전화벨이 울리고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많은 변호사들이 그와 같이 국회에 진출해서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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