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일, 목회 일 ‘정신적 밥퍼 운동’ 하듯이”

지하철 가판대에 걸린 잡지표지에서 문흥수 판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법원개혁의 기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보수적인 사법부에서 꽤나 고통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법관을 지낸 원로에게서 들은 판사의 금기사항이 있었다. 그 사회에서 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론에 기고를 한다든가 책을 내는 것, 대학에 출강을 가면 찍힌다는 것이다. 그 정도도 못하는데 유력 일간지에 문 판사의 법원개혁 의견이 대문짝하게 나왔던 걸 보면 그는 사법부에서 버티기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문흥수 판사가 얼마 후 옷을 벗고 변호사가 됐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았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서열사회의 맨 앞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걸 스스로 버린 셈이다. 또 다른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그가 목사가 됐다는 얘기였다. 독특한 운명의 소유자가 틀림없었다. 2011년 8월 19일 오전 11시 30분경 교대역 부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몇 명의 변호사가 모인 작은 로펌이었다. 그는 법정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문흥수 변호사가 법정에서 돌아왔다. 넓은 이마에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오랜 판사생활을 한 사람 답지 않게 그의 주위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사무실 탁자에 마주앉아 얘기가 시작됐다.
“목회활동을 특이하게 하신다는데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파트 단지 내 3층 상가건물을 얻어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새벽기도부터 인도하고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인이 백 명가량 됩니다.”
“변호사이신데 그렇게 교회를 운영해 갈 수 있습니까?”
“신학도 전공하고 교단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인준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영적밥퍼’ 운동을 하고 있어요. 이제 세상에는 정신적 양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책을 사서 읽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영적인 책을 내고 싶어요. 그리고 특강이나 강의에도 열심히 나가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회가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가지게 하고 싶은 거죠.”
그의 내부에는 종교적 뜨거움이 있었다. 판사를 하다 나오면 열심히 돈을 벌려고 사건을 따라다니는데 그는 아니었다.
“아직은 자신의 노후와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할 때가 아닌가요?”
“저는 큰돈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늦게 얻어 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이 있습니다. 그 아이의 앞날을 위한 정도만 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 저를 위해서는 돈들 일이 없는 것 같고 변호사를 하면서 이미 충분히 벌었다고 생각합니다. 판사를 오래해서 연금도 나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양복을 봤다. 오래된 소박한 옷이었다. 구두도 십 년쯤은 신었을 싸구려 같아 보였다. 변호사 가방 역시 어디서 기념품으로 받았을 것 같은 걸 사용하고 있었다. 사치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부자인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면 변호사로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십니까?” 내가 물었다.
“교회운영을 하면서 선교책자를 만들고 결손가정이나 불치병 환자, 오지의 선교사들을 돕는 데 더러 사용하기도 합니다. 헌금보다 내가 변호사를 해서 번 돈으로 쓰는데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변호사입니까? 성직자입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교회 일을 하다보니까 변호사를 이제 그만두고 싶은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변호사를 계속해야 사람도 만나고 사회경험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도 하고 그러죠.”
이미 그는 뭔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잡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 개인을 알려면 어떤 집안의 자식인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법조인에게는 가장 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처참한 집안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추상적으로 얼버무린다. 열등감에서 풀려난 사람은 서슴없이 신산스러웠던 과거를 얘기한다.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침묵하곤 했다.
“저는 예산의 가난한 농사꾼 아들입니다. 열한 명의 식구가 다섯 마지기 논과 작은 밭떼기에 매달려 살았죠. 제가 자랄 때만해도 보릿고개라고 봄에 쌀이 떨어질 때가 있었어요.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보리를 먹이고 나는 푸성귀를 먹고 그 시절을 났다’라고 하셨죠. 집에서 학비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장학금으로 중·고등학교, 대학교는 물론이고 하버드까지 나왔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나도 비슷한 세대를 살아봐서 안다. 그 시절도 빈부차이가 많았다. 부잣집 아이들이 과외도 하고 가정교사에게서 개별지도를 받으면서 명문고등학교와 좋은 대학을 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방에서 빈농의 아들이 서울 법대에 진학했었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우리집안은 원래 어머니가 절에 가서 치성을 들이는 불교집안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저한테 말씀하시기를 시편 23편을 삼천 번 암송하면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했죠. 쉬는 시간이나 잠자기 전에 중얼거리면서 암송했어요. 그게 효과를 봤는지 재수도 안하고 서울 법대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있었던 경사였죠.”
그는 영적인 걸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단순성과 순결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대학시절과 사법연수원시절의 얘기가 이어졌다.
“대학 졸업 무렵 수술을 하고 한 열흘간 누워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판검사를 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좋은 인생만은 아닌 것 같았어요. 또 육법전서를 달달 외운다고 해도 깊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구요. 천하에서 좋은 책을 구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서삼경과 불경, 노자의 도덕경과 성경을 구해 법서들과 함께 읽었죠. 거기서 많은 힘이 생겼는지 사법시험에 떨어지고 군대문제가 닥치고 집안사정이 어려워도 참아내게 되더라구요.”
그가 정신적 밥퍼 운동을 하는 배경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그 자신이 영혼을 깨우는 경전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솔직한 고백이 이어졌다.
“판사를 하던 어느 날 법조비리문제가 터졌어요. 법관이 소신껏 재판을 하려면 법원장의 평가나 승진에 목을 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견을 법원내부의 인터넷 망에 올렸죠. 연수원 수석을 한 캐리어로 후배판사들이 많이 지지하고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런 내용이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면서 제가 본의 아니게 개혁의 전도사가 된 겁니다.”
그는 법원내부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경험자였다. 조직적 이기주의에 가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사법부의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저도 법관을 해 봤습니다만 재판을 하려면 실제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해야 합니다. 변호사 경험이 중요한 거죠. 사법연수원에서 기록 보고 판결문 쓰듯이 그렇게 현실에서 하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오고 있습니다. 세상경험 별로 하지 않고 연수원에서 성적을 좋게 받은 사람들이 판사가 되어 나이 먹을 때까지 세상과는 동떨어진 재판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도 판사를 했지만 그 분들 실체적 진실의 10퍼센트 정도도 알지 못하고 재판을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판사들 참 소극적입니다. 당사자로서 돈을 들여 소송을 할 때는 얼마나 억울하면 그럴까 한번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고의 승소율이 반이 될까 말까 합니다. 변호사를 해보니까 피고 쪽 대리인을 하는 게 훨씬 편해요. 저는 그원인이 법원의 소극성에 있다고 봅니다. 저는 판사를 하면서 법원의 구조적인 문제를 몸으로 느낀 사람입니다.”
“구조적인 문제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겁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저는 법원을 판사들이 적당한 시점에 변호사를 하기 위한 양성소라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대형로펌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유리하게 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많다고 봅니다. 대법관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 변호사를 합니다. 그 이름만 서류에 올리는데 3000만 원을 받아요. 이게 전관예우가 아니고 뭡니까?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판사들이 정의로운 판관으로 법원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판사들도 자기가 잘못한 재판에 대해서는 심판대에 올라가야 할 겁니다.”
그는 얼마 전 ‘정의와 헌법’이란 책을 썼다. 그쪽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물었다.
“지금 우리 사법부나 검찰에서 정의가 얼마나 이루어진다고 보십니까?”
“제가 검찰에 형사고소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0건 정도를 고소하면 기소가 되는 건 두세 건에 불과해요. 제가 그래도 명색이 법을 모르고 고소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검찰을 보면 기소를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요. 도대체 정의가 실현되는지 의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20~30% 정도만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봐야죠.”
그의 명확하고 심플한 논리였다. 그가 덧붙였다.
“제가 판사 출신이라 특별히 차별을 받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검찰 출신 변호사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분명 사회정의 실현에 검찰부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공개적으로 하기엔 쉽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건 용기였다. 부당한 걸 보고 분노하지 않는 곳에 정의는 없다. 그가 계속했다.
“얼마 전 300억 땅 사기 사건의 수사를 한 지방검찰청에서 한 적이 있어요. 천문학적 수임료를 받은 검찰총장 출신 변호사 세 명이 붙어 있더라구요. 전관 출신 변호사를 통해 사실을 왜곡시키는 걸 봤습니다.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이 거짓말로 도배가 되고 가짜 증인이 인해전술 식으로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과연 정의가 어디 있는지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절차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그걸 다루는 판검사나 변호사를 신뢰할 수 있어야 사회정의가 구현된다고 봅니다. 잘못을 했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변호사도 노력한 만큼 보수를 받아야지 전관 출신이라고 그렇게 큰 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준엄하게 법조계의 현실을 지적했다.
“변호사 사회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내가 물었다.
“법정에 가보면 변호사들의 뻔한 거짓말에 속이 상한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죠. 사회경험이 없는 판사들은 형식논리나 조작된 증거에만 집착하고요. 안될 사건도 마치 이길 듯 큰소리치고, 안 되면 항소하고 대법원에 상고하게 하고 모든 잘못을 슬쩍 법원에 미루는 변호사들을 보면 한심합니다. 그렇게 사기까지 쳐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의 비판은 거침이 없었다. 경험에서 나오는 현실적이고 정확한 지적이었다.
“의뢰인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내가 물었다. 국민이나 대중이란 관념은 추상적으로는 성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의뢰인 하면 억눌리고 고통 받는 선량한 사람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변호사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런 인식과는 다를 때가 많았다. 그걸 문 변호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의뢰인을 보면 상중하가 있어요. 좋은 의뢰인은 좋은 사건을 가져오고 감사해 하고 다른 사건도 보내고 그래요. 때로는 성공보수도 주죠. 평범한 의뢰인은 이기면 이기나보다 하죠. 그리고 나중에 돈을 주기 아까워 하죠. 제일 사악한 저질의 의뢰인은 소송에서 이겨도 ‘당신 한 게 뭐 있어?’ 하고 덤비는 스타일이죠. ‘내가 재판준비도 다 해 줬는데, 뭐’ 하면서 이길 사건 당연히 이긴 거니까 준 돈 도로 다 내놔 하는 종류입니다. 이런 종류의 황폐한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서 쌍욕도 하고 찾아와 행패도 부립니다. 더러 변호사협회에 진정도 하고 고소도 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착수금을 돌려받으려고 하는 짓이죠. 처음에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도대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회의가 들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은 이해를 합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도 황폐하게 되어 있는 거죠. 제 경우는 좋은 일 한다고 무료나 염가로 변론해 준 대상 중에 이상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오히려 돈을 많이 받은 당사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어렵게 인생을 산 사람들이 영혼마저 그렇게 되는 걸 보면 안타깝죠.”
8년 변호사생활에 그는 도가 통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문 변호사는 어떻게 해야 그런 병리현상들이 치유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일본의 경우는 우리보다 송사가 훨씬 적습니다. 일본인들은 순간순간 작업일지나 메모를 쓰는 습관이 있어서 그만큼 조작이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사회를 보면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아무 근거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가 소송이 제기되면 거짓말에 거짓증거로 도배를 해 놓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100원 이상의 계약서는 모두 엄하게 형식을 취해 서류로 만들도록 한다던가 변호사가 입회해서 명확히 계약서를 쓰게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것은 국민의 정의의식을 높이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 정의라는 책을 썼어요.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니까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반론을 제기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판례의 입장을 소개하기도 했죠.”
“결론적으로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제일 좋은 건 의뢰인한테 진리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변호사를 해야 사람도 만나고 사회경험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죠. 전 변호사를 하면서 법원에 있을 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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