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법의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판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설득하는 거죠"

서초역 네거리 한편에 장방형의 커다란 유리빌딩이 보인다. 여러 회사가 입주해 있다. 그 빌딩은 윤학 변호사의 물질적인 성공의 상징이기도 하다. 빌딩의 전면에는 ‘잃어버린 신발 100켤레’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나를 찾아가는 평화여행의 길을 안내한 윤 변호사의 에세이집이다. 영혼의 산을 올라간 삶의 궤적을 그린 책이다.
그는 물질과 정신 두 면 다 아름다운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윤학 변호사의 사무실을 몇 번 방문했었다. 넓고 시원한 사무실에 고급 음향기기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자동스크린 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별로 이용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볼 때마다 그는 다른 일로 바빴다. 월간 잡지 ‘리더스’를 만드는데 혼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마치 세탁소 주인이 손님이 가지고 온 옷의 흠집을 짜깁기 하듯 외부원고를 수선하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 의자배치는 특이했다. 외부손님이 앉는 자리는 가죽으로 된 고급소파다. 그 앞에 두꺼운 원목의 탁자가 놓여있다. 그런데 막상 주인인 그가 앉을 의자가 없다.
그의 태도를 눈여겨 보았다. 그를 방문할 때마다 그는 구석 벽에 놓인 딱딱한 의자를 끌어다 놓고 거기에 앉았다. 얼핏 보면 무심히 흘릴 수도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의미가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을 낮추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섬기는 철저한 정신이 숨어있었다.
볼 때마다 그는 맨발이었다. 발뒤꿈치의 각질과 균열은 외형적인 데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항상 며칠 입은 듯한 티셔츠에 구겨진 면바지 차림이었다. 책 속에 간간이 비친 그의 인생역정은 이랬다. 해남출신인 그는 목포에서 뱃길로 여섯 시간 거리인 섬에서 살았다. 마을의 방 한 칸을 세내서 아버지가 영세한 한약방을 하면서 그곳에서 가족이 한데 엉겨 지냈다. 어린시절 그는 아버지의 약값 받아오라는 심부름도 하고 참외와 수박을 팔기도 했다. 그는 처녀시절 방직공장에 다니던 어머니의 얘기도 숨기지 않았다. 섬에서 중학을 졸업한 그는 명문고에 떨어졌다. 대학도 두 번을 실패했다. 공장에 다니던 사촌누이들이 사는 가난한 집 다락방에서 다시 도전해 서울 법대에 합격했다. 그 역시 없는 집 자식들의 상승통로였던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만에 합격하고 개인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변호사의 시작이 소박했다. 중고가구상에서 책상을 사고 선배변호사가 쓰던 집기를 물려받았다. 차는 소형 포니를 직접 운전하고 다녔다. 이게 대충 그의 책에 나타난 삶의 편린이었다.
2011년 8월 11일 오후 그를 찾아갔다.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의 신산스러운 지난 날의 삶과 세상적인 성공에서 얻은 결론을 묻고 싶었다. 변호사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그는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서른 살부터 변호사로 뛰었죠. 작은 섬 출신이기 때문에 고향에 고객이 될 분들은 없었어요. 가까운 선배들이 브로커를 쓰라고 해도 거절했어요. 그렇게 하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혼자 맑게 변호사를 해 보고 싶었어요.”
그의 책에는 첫 사건에 대한 추억이 적혀 있었다. 개업한 지 한 달 쯤 되자 부인 두 명이 상담을 왔었다. 남편들이 집행유예 기간 중에 다시 똑같은 범죄를 더 크게 저지르고 감옥에 갔는데 석방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부인들은 세운상가의 닳고 닳은 장사꾼이었다. 이미 몇 군데 법률사무소를 돌아다니면서 돈만 많이 쓰면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는 듯 큰소리치는 변호사들의 기만성을 파악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정직하게 얘기해 주었다. 세상사를 꿰뚫는 그 부인들은 윤 변호사의 정직을 선택했다. 그의 상품은 정직과 열정이었다. 손님들이 하나씩 둘씩 꼬리를 물고 생기기 시작했다.
그에게 재판의 본질이 뭐냐고 물었다.
“십년 동안 변호사로 열심히 뛰면서 재판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죠. 재판 이게 법의 문제가 아니더라구요. 판사의 심리를 파악하는 거고 그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춰 설득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제출하면 되는 겁니다. 저는 그 눈치를 빨리 채는 편이었어요.”
그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주장만 강하면 판사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가 계속했다.
“어느 날 동료 변호사들끼리 점심을 먹는데 내 순소득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그대로 얘기했더니 모두 놀라는 표정이더라구요. 브로커를 쓰는 다른 변호사의 총수입은 나보다 훨씬 많은데 순소득은 내 3분의 1 밖에 안된다는 거예요. 나는 여직원 월급과 임대료만 내면 되지만 그 변호사는 개업비용으로 빌린 돈의 이자며 여러 직원의 인건비와 사건소개비로 비용이 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많이 벌지 못해도 적게 쓰면 되는 거죠. 그렇게 하면 고객을 당당하게 대할 수 있고 초조하지도 않죠.”
이어서 그는 브로커를 쓰는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의 현실을 이렇게 말했다.
“브로커 사무장 세 명을 쓰고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의뢰인들이 찾아오고 사무실이 번창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구요. 그 변호사 고객이 많아 열심히 교도소로 법정으로 뛰어다니며 보내는 걸 봤어요. 그런데 사건을 가져온 브로커에게 소개비와 급료를 주고 임대료며 각종 세금을 내고나니 오히려 적자라는 겁니다. 고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을 처리하느라고 피곤해지고 그에 따라 승소율은 떨어지고 비용은 높아지는 구조죠. 마지막에는 폐업을 했어요.”
그는 실패한 변호사들의 모습을 이렇게 몇 가지 더 소개했다.
“후배 변호사 한 사람은 각종 모임에 찬조금을 내면서 사람들과의 유대관계에 힘을 쏟았어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차별화한다면서 외국법을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국제법 전문가라고 하면서 명함을 뿌렸죠. 외국변호사를 고용해서 사무실도 확장했어요. 기업체나 대학의 초청을 받아 외국법을 강의하고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도 했죠. 그런데 한국사람이 외국법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제가 알기로는 노력에 비해 수입이 없어요. 그 후배는 국제법 전문가로 알려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국내소송을 맡기지 않아 사무실 운영도 어렵죠.”
그가 잠시 얘기를 끊었다가 덧붙였다.
“재벌의 상속녀와 결혼한 아는 변호사가 있어요. 기사가 운전하는 벤츠 뒷자리에 앉은 젊은 그의 모습이 화려했죠. 미남이고 머리도 좋고 활동적이죠.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돌리는 걸 봤어요. 사업에도 손을 대고 정치도 한다고 돌아다녔는데 한참 후에 보니까 이혼하고 사업도 크게 망했더라구요. 그 바쁜 인생에서 뭘 추구하며 살았는지 의문이더라고요.”
그의 얘기는 확실히 변호사의 삶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이었다. 변호사 생활을 십년 한 후 그는 삶의 좌표를 엉뚱한 곳으로 변경했다. 갑자기 잡지를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이다. 폐간위기에 있던 ‘가톨릭 다이제스트’를 재창간해서 수만 명의 독자에게 사랑받는 잡지로 만들었다.
지금 그는 또 다른 잡지‘리더스’를 만들고 있다. 그 동기를 물었다.
“변호사를 하다보니까 좀 더 의미가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밤 두세 시까지 열심히 준비서면을 쓰면서 일할 때 의뢰인은 쿨쿨 자는 겁니다. 그런데도 돈 몇 푼 줬다고 나를 보면 의심하고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화가 나고 회의가 들기도 했어요. 또 정신없이 의뢰인들을 위해서 뛰다 보니까 정작 나를 위해 산 게 없어요. 아이들하고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고 말이죠. 내가 이렇게만 살아야 하나 하고 회의하면서 더 귀하게 쓰일 일을 찾고 있는데 아는 신부님이 ‘가톨릭 다이제스트’ 잡지를 맡아줬으면 해서 주저 없이 맡게 됐습니다.”
“바로 적자를 볼 게 당연하고 전망도 없는 사업 아닙니까?”
내가 물었다. 종교잡지라면 기본 인쇄비조차 건지기 힘들다.
“저도 그 손해 볼 비용을 놓고 고민했죠. 그러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변호사 생활을 십년하면서도 제대로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몇 억을 쓴다고 해도 그건 하느님의 것이지 제 돈이 아니라고 마음먹으니까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사실 제가 어려서부터 글에 관심이 많았죠. 시골에 살면서도 신문의 칼럼을 샅샅이 봤어요. 대부분이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거나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글이었어요. 그런 속에서도 좋은 글을 보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이런 글만 실리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독자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하려면 선정적인 글과 광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흙덩이로 옹기를 빚어내는 옹기장이처럼 드러나지 않는 따뜻한 분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진짜 차원 높고 좋은 글들이 있어요. 그런데 조선이나 동아 같은 신문들을 보면 그렇게 좋은 걸 받아들이지 않고 사장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진주 같은 그 가치를 모르는 경우도 있고 또 대중의 입맛에만 맞추려고 그런 면도 있죠. 진짜 빛이나는 귀한 글들을 찾아 담는 잡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제 변호사 사무실이 정곡빌딩에 있었는데 아내와 함께 밤새도록 잡지를 만들었어요. 변호사 일을 할 때는 외로웠는데 이 일은 기쁨이었어요. 그리고 좋은 글을 만날 때의 그 축복감을 남들은 몰라요.”
그는 글을 통해 세상에 조용히 평화를 심는 황무지를 일구기로 했다고 책에서 쓰고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변호사 사무실이던 정곡빌딩에서 집사람과 밤을 새는 날이 많으니까 수시로 경비하는 분이 와서 나가달라고 독촉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융자를 얻어 서초역 부근에 땅을 샀는데 건물까지 지어주고 거액의 임대료를 내겠다는 업체가 나오지 뭡니까? 내 돈 안들이고 땅 사고 빌딩을 지은 셈이 됐죠. 부자가 됐습니다. 잡지를 하면서도 요 옆에 땅을 더 샀어요. 변호사 할 때는 출장갈 때 비행기를 타고 호텔에서 잤어요. 그런데 책장사를 하다보니까 완행열차를 타고 지방 여관에서 묵어요. 그리고 택배도 쓰지 않고 내가 직접 들고 배달을 다니고 있습니다. 잡지 몇 권을 팔기 위해 전국 성당을 돌아다니며 강론도 하죠. 그런 중에 우유배달 아줌마가 잡지를 보내달라며 꼬깃꼬깃한 돈을 정기구독비로 줄 때면 가슴이 찡해요. 친구들은 밥은 사도 내가 만든 잡지를 구독 신청해 주지는 않아요. 그런데 시골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잡지를 보내달라며 돈을 보낼 때는 정말 흐뭇하죠.”
밖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저녁 내내 그와 근처의 매운탕 집에서 밥을 시켜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이미 보통 변호사들의 의식세계를 떠나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싱긋 웃으면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렇게 잡지를 만드는 게 세상을 위한 변론이고 진짜 변호사죠. 잡지를 가지고 세계로 나아갈 겁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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