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변호사의 고민 대변하는 대한변협 대변인”

대한변협의 대변인인 노영희 변호사는 위풍당당한 여장부 타입이다. 사십대 중반의 여성변호사인 그녀에게서는 강인함과 짙은 정의감이 짙게 피어오른다. 2011년 초 사법연수생들과 청년변호사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대법원 앞에서 데모를 하기도 하고 기득권층의 변호사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 변호사는 대변인으로서 그들의 말을 허심탄회하게 듣고 용기 있는 의견을 얘기했다. 사실 그녀는 경력 5년의 변호사다. 직업적 삶이 아직 주위에 시선을 돌릴 여유 있는 때는 아니다. 아직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고 고통을 겪는 순간일 수 있다. 동료들 대부분이 사건 하나라도 더 유치하려고 치열하다. 그러나 그녀는 대한변협 대변인으로 열정적으로 뛰고 있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한변협신문의 기자를 자청해서 법조의 불공평과 부조리를 취재하고 있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전문직 사회에서 노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있어 변호사 사회가 건강해 진다. 그녀는 한참 성장하는 아이 둘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런 여성변호사로서의 삶은 어떤 것일까? 동시에 그녀는 또래 변호사들의 고민과 고통을 대변한다. 그게 어떤 것일까가 궁금했다. 가는 빗줄기가 흩날리던 2011년 8월 4일 오후 그녀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법원 동쪽 담벼락 바로 옆 작은 건물의 4층에 그녀의 사무실이 있었다. 깨끗하고 담백한 실내공간이었다.
“저는 인터뷰 대상이 아닐 텐데요? 공익을 위해 한 것도 없고.”
그녀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비슷한 환경의 변호사들을 대변해 달라고 설득했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것 같았다.
“먼저 자기를 말해 줄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자신의 마음 문을 어느 정도 여는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열린 문으로 신산스러운 인생여정이 보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아버지가 건설현장의 작업반장 출신이에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새벽부터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분이셨어요. 남에게 돈을 꾸러갈 정도는 면한 환경이었죠. 열심히 공부했어요. 외고를 졸업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했고요. 시간강사 생활을 하면서 박사과정에 들어갔어요. 회사원인 남편과 결혼하고 첫딸을 낳았어요. 강사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죠. 김영삼 대통령 손자한테도 언어사고력을 가르쳤어요.”
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오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계속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갔는데 솔직히 교수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또 영재들을 가르쳤다고 하지만 까놓고 보면 학원선생 아니겠어요? 아이들 엄마를 상대하기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기대치들이 높으니까 그 분들이 너무 피곤한 거예요. 그래서 다른 길이 없을까 모색하다가 사법시험을 치기로 했어요. 그래도 사법시험제도가 좋은 것 같아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상승통로였잖아요? 로스쿨 가라고 했으면 나 못갔을 거예요.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겨놓고 신림동으로 들어갔어요. 심리학을 전공했으니까 헌·민·형이 뭔지 개념조차 없었던 거죠.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니까 합격하더라구요.”
말은 쉽게 하지만 그녀 내부에서 치열한 집념이 보이는 듯했다.
“그 다음은요?” 내가 물었다. 현실의 파도도 만만치 않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진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죠. 법대 출신도 아니고 나이도 많았죠. 로펌에 들어간다고 해도 평생 종속될 것 같아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해봤어요. 그러다가 떠오른 게 구로디지털단지였어요. 재벌기업들은 이미 다 단골 변호사가 있을 것이고 중소기업에서 내 터를 찾자고 생각했죠. 구로동 공장단지 안에 법률사무소를 차렸어요. 제가 시작할 때만 해도 그 안에 변호사 사무실이 없었죠. 중소상공인들의 모임에는 다 따라다녔어요. 친목단체에도 들어가구요. 그러니까 조금씩 사건이 들어오더라구요. 처음에는 작은 것들이었죠. 계약서도 작성해주고 공장 임대차 문제도 해결해주고 물품대금 소송도 맡았죠. 그러면서 아예 기업들하고 자문계약을 하고 한 달에 50만 원씩에 고정적으로 돈을 받았어요. 몸 아끼지 않고 뛰니 형편이 좋아지더라구요. 남편이 회사 그만두고 미국에 가서 MBA를 하고 오고 싶다고 했어요. 딸도 공부를 시킬 겸 남편과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어요. 물론 제가 뒤에서 돈을 벌어댔죠.”
대단한 활동가였다. 배짱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이렇게 말했다.
“저 한참 잘 나가다가 사기당한 거 아시죠? 전번에 대한변협신문에 썼는데.”
그녀가 이어서 얘기를 계속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에서 활동을 하는데 연수원을 졸업한 변호사들이 그곳으로 몰려오더라구요. 저는 자리를 뜰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서초동으로 사무실을 옮겼어요.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사무원 하나를 데리고 별산제를 하는 법무법인에 가입해서 다시 열심히 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기를 당한 거예요.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할 때부터 알던 사람인데 주식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금융통이예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이 저한테 5000만 원만 꿔주면 한 달에 백만 원씩 이자를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했죠. 이 사람이 수시로 저를 찾아와 증권자료들을 보여주면서 투자를 하라고 권하더라구요. 조금씩 투자를 해 봤어요. 처음에는 재미도 보고요. 그런데 한번은 그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다른 사람들이 투자한 돈을 갑자기 빼서 힘든 상황이 됐으니 돈을 구해달라는 거예요. 그동안의 신용도 있고 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돈 다 털고 주변에서 꾸기까지 해서 10억 원을 만들어 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연락이 딱 끊긴 거예요. 도망가 버린 거죠. 막상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더라구요. 빚진 돈을 갚느라고 죽어라고 일했습니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이제는 대충 다 갚아 갑니다.”
그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가슴에 큰 상처로 맺힐 텐데도 강물에 흘려버리는 성질 같았다.
“비슷한 또래의 사법연수원 동기 변호사들은 상황이 어때요?”
내가 화제를 돌렸다. 다들 그렇게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 여러 종류예요. 나타나는 현상도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해야 하나? 변호사라는 직업관도 옛날 소수 정예를 뽑을 때의 대접이나 특권을 그대로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 이제는 아니다 라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들을 폄하하는 경우도 있죠. 연수원 동기생 한 사람은 펀드로 일확천금을 하겠다고 동기생들 돈까지 가져가더니 나중에 몰려서 자살하기도 했어요. 또 생활고에 몰려 죽는 경우도 봤고요.”
꿈을 꾸기도 하고 거기서 깨면 절망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산 정상에 올라간 후 허허로운 깃발만 꽂아놓고 내려선다고 법정스님은 말했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보기에 동기변호사들 중에도 착실한 사람도 많아요. 자판기를 관리하면서 공부하던 연수원 동기생 하나는 그 어려운 연수원시절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와 동생들을 도왔어요. 부모님이 농아셨죠.”
사법시험 합격자에게 기대하는 가난한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환경의 변호사들이 많을 것이다.
“사법연수원 동기 변호사들을 보면 힘든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서 가족 먹여 살리고 형제들 도와주는 성실한 사람들이 많아요. 5년 차가 됐는데도 취직한 사람들은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아요. 그런 속에서도 정직하게 꿋꿋이들 살아가고 있죠.”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물었다. 개업 5년 차의 시점에서 변호사에 대한 느낌을 알고 싶었다.
“막상 해보니까 저는 변호사가 비생산적이란 생각도 듭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그래도 지식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보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변호사는 그게 아니에요. 사건 때마다 상대방과 싸우면서 반목을 해야 하는 거예요. 상대방의 허점이나 찾아내려 하고 또 제 자신이 생각해도 뻔뻔하게 대응할 때가 있어요. 속이 편치 못한 경우가 많죠. 이겨도 이기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해도 지면 의뢰인은 잘못을 모두 변호사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학부형의 높은 기대치 때문에 부딪히는 게 싫어 법조계로 왔는데 이쪽도 당사자가 가만 놔두지를 않네요. 변호사라는 직업이 혼자서 사무실을 꾸려가야 하는 숙제도 있고 사건을 혼자 하다가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스트레스도 강해요. 내가 실수하면 사건을 맡기는 당사자의 일생이 망가질 수도 있잖아요?”
“법원이나 검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물었다. 많은 부딪침과 장벽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판사도 검사도 싫을 때가 많아요. 주장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죠. 제가 경험한 바로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과 판·검사들의 관점이 다른 것 같아요. 판사나 검사들은 자기네가 필요한 법적인 관점에 맞도록만 요구하고 그 시각 이외에는 무관심하죠. 제가 보면 너무 귀하게만 자라서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판사 자리에 앉아 쟁점사항에만 맞추어 주장 입증해 달라고 보채는 거예요. 법원을 보면 검사가 기소한 게 맞겠지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형사사건을 하기 더 힘들죠. 그런데 일반사람들의 시각을 알고 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말이 맞아요. 판사나 검사들이 국민들의 생각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약한 것 같아요. 더러 그런 말을 하면, 난 판사인데 연수원 졸업하자마자 변호사 개업을 한 실력 없는 너희가 뭘 알아 하는 교만들이 속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담벼락 같은 인식과 부딪칠 때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든 경우가 많았어요.”
그녀는 이미 세상의 핵심에 도달해 있었다. 자신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법적 관점은 동시에 세상을 보는데 맹점이 될 수 있다. 천장을 바라보면 바닥이 안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녀의 고통이 그 모두를 보게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들 학비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벌면 좀 더 공부하고 싶어요. 실력을 쌓아서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자신을 만들고 싶어요.”
내면에 가득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공단으로 들어가 다양한 경험을 했다. 가족들의 버팀기둥이 되면서 삶을 공부했다. 거액의 사기를 당하면서 고통이 뭔지를 몸으로 체험했다. 그녀는 사회적 약자들과 동행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변호사가 틀림없을 것 같았다. / 엄상익 공보이사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