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란 제 목소리 못내는 이를 위해 말해주는 사람”

건물 4층의 문 앞에는 ‘두드림’이라는 사무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이미 그 문은 열려 있었다. 난민 같은 외로운 약자들을 위한 법률사무실이었다.
목숨의 위협을 피해 북한으로 가다가 우연히 인천항으로 들어온 콩고인도 있었다. 브로커들에게 속아 한국으로 건너와 매춘부로 전락한 러시아 여인을 도와주기도 한다.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사마리아인 역할을 하는 사무실이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 낯설고 외로운 타국에서 방황하다가 그런 따뜻한 등불이 켜진 집을 보면 둥지를 찾은 듯 정말 포근할 것 같았다.
두드림 사무소의 중심에 사십대 초반의 김종철 변호사가 있다. 대한변협 회의 때 협회 인권이사로 일하는 그의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투박한 얼굴에 김구 선생 같은 동그란 안경을 썼다. 만만치 않은 영혼을 가진 과묵한 사람이었다.
폭양이 쏟아지던 2011년 8월 2일 오후 3시 30분경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용한 사무실이었다. 입구 쪽 열린 문틈으로 이십대 초쯤의 여자 두 명이 바닥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김 변호사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구석의 사무실에서 나와 나를 맞이했다. 남방셔츠 차림의 소박한 모습이다.
“사무실이 너무 좁아서… 구석의 다른 방으로 가시죠.”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김 변호사 방부터 먼저 구경하고 그곳에서 얘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제의했다. 방은 그 사람의 모습과 성품을 알려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러 변호사들의 방을 가 봤다. 책과 자료들이 지적 난민같이 바닥부터 의자 위까지 점령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의뢰인을 의식한 듯 기름이 흐르게 고급가구와 소파를 갖춘 곳도 있었다. 초현대식으로 전자제품들을 배치한 곳도 있었다.
열려진 문을 통해 그의 사무실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닌 것 같았다. 좁은 방 안에 젊은 사람들 두 명이 더 보였다. 좁은 공간을 세 명이 공유하는 것 같았다. 자그마한 책상 하나가 창턱에 붙어 있었다. 김 변호사의 책상이었다. 일본작가 야마자키 도요코는 책상의 위치로 그 방 주인의 인격을 평가했다. 방 중앙에 책상을 놓는 사람은 권위주의적이라고 했다. 반면 벽에 책상을 붙여놓는 인격은 실용적이고 겸손한 인물로 봤다. 그만큼 공간 활용을 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방안에 있던 직원인 듯한 이십대 여자들이 밝은 표정으로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주 밝은 얼굴들이다.
“우리를 돕는 인턴들입니다. 자원봉사자죠.”
김종철 변호사가 그들을 내게 소개했다.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는 외국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외국어에 능숙한 자원봉사자들이 돕는 것이다. 좁은 사무실에서 얘기하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우리는 구석방에 탁자를 가운데 놓고 마주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됐죠?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에게 아직 어떤 결론을 물을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먼 바다를 향해 이제 돛을 가득 올리고 출항하려는 꿈 많은 청년변호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법무법인 소명이라는 곳을 들어갔습니다. 특이한 법인이었습니다. 변호사들이 각자 일을 하고 그 외에 공익활동을 자진해서 했죠.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난민이나 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위해 공익활동을 하다보니까 아예 거기에 내 삶을 온전히 바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나와 이 사무실을 차리게 된 겁니다. 지금은 저와 자원봉사자들이 일하지만 로스쿨생들이 변호사로 배출되는 내년부터는 이런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걸로 기대합니다. 그런 공익법률사무실을 키워가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새로운 모습의 변호사가 탄생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이나 동기는 어떤 걸까요?”
내가 물었다. 변호사가 풀타임으로 공익소송만 한다는 건 성직에 버금가는 자기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입소를 미루고 강원도에 있는 신앙공동체에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었습니다. 세속적인 법률가를 하기 이전에 믿음과 노동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그 자체가 심상치 않은 말이었다.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하버드대를 나온 청년이 콩코드에 있는 호숫가에서 최소한의 생활로 삶의 자유를 구가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독특한 영혼을 가진 자연주의자였다. 법정스님도 그 비슷한 인생행로를 거쳤다고 할까. 김종철 변호사에게서는 그들과 비슷한 풀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보고 공부했죠. 오후가 되면 배추밭도 돌보고 건물수리나 장비를 만졌어요. 틈틈이 산속에 있는 중증장애인들을 찾아가 말벗이 되기도 했어요. 거기서 2년 반을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곳에서 둘째아이도 태어났죠. 강원도 양양의 산 속은 극장도 없고 슈퍼에 가려고 해도 산 아래로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자연이 주는 충만감이라고 할까? 또 다른 기쁨이 있었습니다. 남대천의 맑은 계곡 물에서 또 다른 삶을 발견했다고 할까요.”
한시라도 바삐 연수원을 들어가고 조금이라도 좋은 성적을 따서 경쟁자를 밀치고 판검사가 되어 으쓱대며 잘살고 싶은 세상이었다. 그는 스스로 반대의 길을 택하고 있었다. 배경이 궁금했다.
“자란 환경을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개인사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부모의 환경이 좋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용들은 개천을 자기의 고향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상당수가 어둡고 추웠던 겨울 같은 과거가 가슴속에 있었다. 남모르는 열등감들도 꼭꼭 숨겨놓고 있었다.
“저는 수원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목사로 신학대 교수시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입니다. 두 분 덕에 고생을 한 편은 아닙니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좀 늦은 나이인 서른두 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죠. 사법시험 합격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아내는 대학 불문과 후배였습니다.”
그의 배경에는 경건한 부모의 신앙이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삶으로 궤도를 수정했죠?”
내가 의아해서 물었다. 문득 그는 다른 삶이 아예 예정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원을 미루고 수도원 같은 공동체 경험을 가족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시험공부를 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엇이든 남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내가 가진 달란트를 세상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치열하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 많은 걸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래 심지가 굳지 않은 사람이라 만일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고 바로 연수원을 들어갔다면 일생을 다른 트랙에서 뛸 가능성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공동체 생활을 한 그곳이 저에게 관조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걸 알려 준거죠.”
그의 삶이 어떤 곳을 향해 조금씩 움직여지고 조립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행적이 이어졌다.
“사법연수원에서 우연히 ‘피난처’라는 곳에 가서 봉사를 한 적이 있어요. 전 세계에서 오는 난민들을 돕는 단체죠.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콩고 등 수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난민들이 오는 거예요.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지만 급하게 도피를 하는 그들은 갈 수 있는 나라라고 하면 어디든지 가는 겁니다. 여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들은 정말 비참한 상태더군요. 그들이 최고로 붙잡을 수 있는 게 불법취업정도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한편의 드라마였어요. 연예인 비자로 들어오는 러시아나 필리핀 여자들도 비참했죠. 연수원 때 그들을 도우면서 공익활동에 눈을 뜨게 됐어요.”
공동체에서 영혼 속에 기초가 놓아졌다. 사법연수원에서 구체적인 일이 눈앞에 보였던 것 같다.
“그래도 사법시험에 붙은 다른 사람들처럼 잘되고 싶은 욕망이 뒤에서 잡아끌었을 텐데요?”
내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인간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자기 속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사도 바울도 얘기했다. 오욕칠정에 대해서는 부처도 공자도 다름이 있을 수 없었다.
“사법시험에 늦게 합격하니까 메인스트림에 대한 열망도 솔직히 없었습니다.”
그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신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끌고 가기도 한다. 사법시험에 늦게 합격하거나 나이가 먹은 사람, 성적이 나쁜 사람들을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오후 늦게 고용된 포도원의 일꾼들이다. 신은 그들에게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과 똑같은 임금을 줄 수도 있었다.
“변호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그에게 물었다.
“저는 ‘애드버킷’이라는 단어가 맞다고 생각해요. 옆에서 대신 말해주는 사람이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죠.”
“지금 하는 사업에서 변호사로서 어떤 일을 합니까?”
내가 물었다.
“그들에게 난민신청방법을 알려주고 함께 법무부에 가서 인터뷰에 입회도 하고 거부당했을 경우 소송을 제기해 주기도 합니다.”
“비용은 어떻게 충당합니까?”
내가 물었다.
“제가 이리저리 변호사 친구들에게 소액의 후원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많이들 도움을 줘요. 젊은 변호사 두 명이 시드머니로 1000만 원씩 줘서 그 돈으로 이 사무실도 얻었어요. 월 30만 원씩 주는 분이 열 명 정도 있습니다. 그 외 소액후원자들이 늘어나고 있고요.”
“가족의 생활비는요?”
“저는 풀타임으로 이 일을 하기 위해 제 생활비도 후원금에서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많이 가져갈 수는 없겠죠. 한 달에 200만 원 정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주는 돈이 100만 원 정도 있습니다.”
“그 돈으로 힘들지 않아요?”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공익활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가 소비패턴과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이들 사교육비라던가 그런 걸 줄이기가 힘들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예 돈 못 버는 변호사로 낙착이 되니까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아이들도 아빠가 뭘 하는지 이제 알아요. 스스로 절제하고 양해를 해 줘요.”
“그런 지금의 삶이 재미있어요?”
내가 물었다.
“다양한 활동가들하고 만나면서 인생에 대해 배우는 게 많습니다. 또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드라마틱한 인생과 함께 하면서 내 변호사 인생도 그렇게 다이내믹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의 변호사로서의 삶도 재미있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슬플 때도 있죠?”
칭찬보다는 비난이 많은 게 공익을 하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사법연수원을 나오고 할 일이 없으니까 그쪽으로 도피한다고 빈정거리는 법조인들도 있다.
“활동가나 저 같은 변호사들을 냉랭한 눈으로 비웃는 사람들을 만날 때 씁쓸한 기분이 들죠. 특히 공무원들 중에 우리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들을 더 묵게 하려고 그러냐고 비웃는 경우가 있죠. 또 우리들을 전혀 다른 인간 부류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좀 우울하죠.”
그가 넘어야 할 계속 닥치는 일상의 파도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굉장히 밋밋한 변호사였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좋은 것 같네요.”
그가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자기를 다 내던지는 그와 같은 인간을 신은 반드시 끌어 올린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그래서 세상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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