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특권, 그에 걸맞은 소임 다하고 싶다”

변호사라면 누구나 그를 부러워할 만하다. 특히 로스쿨생 같이 예비 법조인이라면 그의 존재는 무지개 빛 화려한 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는 M&A 분야의 정상급 존재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제일은행인수, 진로매각 등 여론의 관심을 모았던 사건의 뒤에는 그가 있었다. 소버린의 SK에 대한 공격 등 외국자본의 적대적 공격시에 기존경영진을 방어하는 데도 그가 역할을 했다. 그의 주변은 빛이 번쩍이는 것 같다. 서울법대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졸업 성적, 사법연수원 성적도 대단하다.
국내 최고의 법률사무소인 김앤장에 스카우트된 그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굴지의 회사인 제네럴 일렉트릭의 사내변호사로 근무했다. 그는 현재 대한변협 부협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사법연수원의 법관연수, 변협의 전문강좌에서 M&A관련 강좌를 도맡아 하고 있다. 2011년 7월 28일 오후 4시 30분경 대한변협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쪼개 쓰는 그의 시간을 30분 가량 얻기도 쉽지 않았다. 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M&A에 대해서는 어떻게 눈을 뜨게 됐죠?”
내가 물었다.
“1991년 제네럴 일렉트릭에 근무할 때였어요. 그 회사에서는 당시 중국 정부기관과 의료장비를 생산하는 합작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북경에서 앵글로 색슨계 미국변호사와 함께 M&A협상을 맡게 됐죠. 그 백인변호사를 보니까 중국어로 완벽하게 전문적인 협상을 하면서 한문으로 계약서도 완벽하게 작성하는 겁니다. 그 백인변호사를 보면서 내가 가야할 ‘M&A전문변호사’의 길을 보게 된 거죠. 그 변호사보다 더 뛰어나야겠다는 저의 의지와 목표가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 M&A업무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97년 외환위기 전만해도 M&A는 별로 없었어요. 국내기업들 사이에서 남의 회사를 산다는 개념이 별로 없었고, 외국인 투자도 국내기업인수보다는 설립 쪽이 많았죠. IMF 사태 후에 외국기업들이 국내기업들을 인수하면서 활성화 됐죠. 그 전에 했던 일로 경부 고속전철사업과 관련해서 프랑스의 떼제베 회사를 위해 고속철도공단사이의 협상과 자문을 했던 일이 특히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이었던데다가 경쟁자들이 가처분을 신청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거든요.”
그는 그가 근 30년 해온 중요한 업무적인 노하우를 솔직히 얘기해 주고 있었다.
“제네럴 일렉트릭에 근무하면서 미국회사의 문화를 알게 됐죠. 그리고 고객의 입장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됐어요. 로펌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로펌은 먼저 고객의 비즈니스를 정확히 꿰뚫어야 합니다. 그 위에 법률과 정부규제를 알아야 하겠죠. 고객이 판단을 하게 하려면 정확히 알려줘야 합니다. 딱 들어맞는 선례나 판례가 없으면 두려워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어중간한 답변서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고객의 결정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더욱 합리적인 의견을 명확히 제시해 주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눈높이를 고객회사에 맞추는 게 중요했어요.”
그가 잠시 쉬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법률의견서를 만드는 데도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제품이 맞춤식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사법연수원에서 배울 때는 답이 하나였죠. 그러나 현실의 로펌에서 답안은 상대방에 따라 다양해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외국의 회사가 우리나라 기업을 인수하려고 할 때 인수회사의 재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게 허용되느냐의 문제가 먼저 발생합니다. 그걸 LBO라고 하죠. 영미에서는 그게 허용되는데 우리 대법원 판례 상으로는 인수대상 회사의 이사는 배임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 비즈니스맨이 물을 때는 LBO가 뭔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외국 M&A전문가가 물을 때는 영미에 없는 배임죄라는 죄를 먼저 설명해야죠. 우리나라 사내변호사가 물을 때는 같은 대법원판례도 분석해서 얘기해 줘야 합니다.”
그는 특수분야의 최고 전문가인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성장과정을 대충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그가 스스로 말하고 싶은 만큼만 얘기하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제 경우는 초등학교 시절 진해에서 컸어요. 아버지는 원양어선의 기관장노릇을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계셨죠. 저는 경남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법대에 진학했죠. 인생에 큰 좌절은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꼭 법조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다가 교수를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 정도였습니다.”
“판사를 하지 않고 바로 변호사가 된 동기는 뭘까요?”
“군법무관으로 있을 때 김앤장에 있는 선배가 연락을 했어요. 그곳으로 들어와서 함께 일을 하자는 거였죠. 지금도 마찬가지지 만 그때도 김앤장 하면 수석들이 모여 일을 하는 특별난 곳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사회통념이 사법시험에 붙으면 당연히 판사를 하는 거였고 변호사는 나중에 하는 걸로 알았죠. 집에서 부모님들은 바로 변호사가 되는 걸 반대하셨죠. 거의 이년 가까이 김앤장을 드나들면서 저도 이런저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두환 정권이었어요. 제가 광주항쟁이 끝날 무렵 그 지역 법원으로 실무수습을 갔었습니다.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독재정권에서 과연 제대로 된 판사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경제일선에 참여하는 로펌의 업무가 재미있을 것 같았고 변호사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또 솔직히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경제문제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돈 많은 집 사위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당시의 풍토를 꼬집었다. 김앤장 같은 대형 로펌들은 많은 사실을 베일 속에 깔아놓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비밀주의가 유지되고 있다. 그를 통해 대형로펌의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어땠죠?”
“27년 전인 그때만 해도 지금에 비하면 일이 단순하고 여유도 있는 편이었죠. 지금같이 급박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어요. 주로 의뢰인이 외국기업이었어요. 국내기업들은 아직 대부분 로펌활용을 모를 때였죠. 일중 많은 부분은 외국기업들에게 한국의 법률을 검토해서 영어로 알려주거나 영어로 계약서를 작성, 협상하는 거였어요. 외국인 투자, 기술 라이선스와 같은 업무가 많았습니다.
연수원에서는 접하지 못한 경제 최일선의 업무를 하면서 영미의 선진법률문화를 배우고 영어가 늘게 되니 재미있었죠. 번역도 참 많이 했는데 따분한 일이기도 했지만 저는 번역에서 참 많이 배웠어요. 우선 영어와 우리말 실력이 같이 늘었죠. 거기다가 해당 문서의 내용을 통해 계약서작성법과 법률지식도 많이 익혔습니다. 일하는 분위기도 좋았어요. 대부분이 수석경력을 가지고 있는 머리 좋은 변호사들이었는데 사람들이 순수했어요. 그리고 열심이었구요.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프로의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당시만 해도 지금같이 고도의 지식이 필요가 없는 상태였고 그렇게 바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외국과의 교신은 아주 비싼 텔렉스나 팩스를 이용해야 하는 급한 일이 아닌 한 외국과의 일은 몇 주단위로 이루어졌으니까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메일을 통해 계약서 수정본이 오갈 때도 있으니 정말 옛날일이죠. 그래도 매일 밤 9시나 10시가 되어야 퇴근했고 주말에도 거의 출근했어요. 데이트 할 시간이 없을 정도였죠.”
“처음 수입은 어땠어요?”
“30년이 다 되어 가니까 이제는 얘기해도 될 것 같네요. 급료가 많은 편이었죠. 임관하거나 한 다른 친구들보다 다섯배 가량 됐던가? 그때 액수로 치면 2백만 원이었을 겁니다. 그 돈을 받아 제 용돈정도 남기고 부모님한테 보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 당시의 2백만 원이라는 개념이 계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서울의 아파트가 2천만 원 가량 했다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재산정도나 삶의 질이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최고 전문변호사로서의 성공의 현실을 알고 싶었다. 그게 물질적인 것이라도 후배들은 분명 궁금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부자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에 아파트가 있고 골프와 헬스클럽 회원권이 있고 아이는 미국에서 유학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노후걱정은 없을 정도의 재산적 여유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변호사란 가난함을 면할 수는 있으나 부자는 되기 어렵다는 말을 명심하고 살아왔습니다.”
서민들은 꿈도 꾸기 힘든 위치에 간 게 틀림없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현재 국립발레단 이사도 하고 예술의 전당 후원회의 일도 맡고 있는데 돈이 더 있으면 예술인을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그를 소개한 전문잡지를 보면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하고 있었다.
“취미가 뭡니까?”
내가 물었다. 성공이 상징하는 취향을 알고 싶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것, 골프를 치고 발레를 감상하는 것, 그리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겁니다. 오디오나 명품, 와인도 사기는 하지만 돈을 많이 들이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보다는 좋은 것을 더 잘 알고 즐기는 편이기는 하지만, 좋은 것과 최고로 좋은 것의 차이를 아직 잘 모른다고 할까요? 약간의 차이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쓸 만한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에도 다시 층이 다양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변호사란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합니까?”
변호사마다 정의가 달랐다.
“저는 그야말로 특권을 부여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년배 중에서 천등 안에 들면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로 대접을 받지 않습니까? 그거 특권이죠. 예술이나 과학 분야에서 천등을 해 보세요. 이런 대접 도저히 받지 못합니다. 자격 그 자체로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등이 가질 수 있는 날카롭고 냉철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행로도 도중에 중요한 궤도수정이 있었다. 잘나가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그만 둔 것이다.
“왜 국내 최고인 김앤장을 그만 두게 됐죠?”
그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그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너무 시간이 없고 정신적인 부담이 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조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업화가 되어야 합니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 고객을 개발해야 하는 문제도 생기고 말이죠. 이해는 했는데 그런 속에서도 ‘난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난 순수하고 싶고 변호사가 되고 싶은데 너무 기업의 부품같이 되어 가는 것 같았어요. 저는 법정에서 변호사답게 소송업무도 하고 싶었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기도 했구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자유롭게 살자 하고 모든 걸 다 던져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몸을 담았던 조직의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봐 굉장히 조심하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제가 고객을 가지고 나온 건 아니었어요. 그냥 대책없이 나온 겁니다. 그 1년 후 몇 명의 변호사들이 모여 새로 로펌을 만들자고 해서 탄생한 게 율촌입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죠. 우리들이 만든 로펌은 진정한 파트너십 체제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사건 자체도 누가 수임하든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처리하도록 했구요. 원칙대로 하면서 실력으로 승부를 보자 이거죠.”
그는 지금도 왕성한 현역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 흐른 것 같았다.
“30분만 필요하다고 하시더니요?”
그는 역시 시간이라는 상품에 칼같이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돌아간 그는 자신에 대한 자료를 이메일로 바로 보냈다. 최첨단을 간 성공한 변호사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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