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률가는 ‘기능공 ’인가? -

법학을 흔히 ‘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법률가를 비하하여 ‘율사(律士)’라고도 한다. 이들 모두 법률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로서, 법학에는 생각도 깊이도 없으며 법률가는 기계적으로 조문해석이나 하는 비창조적인 직업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과연 법학은 저급학문이고, 법률가는 기능공인가?
추론과정상 필요하여, 잘 알고 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정치·경제·사회 등 인간생활에 있어, ① 각자의 이해 조정을 위한 최소한의 방편으로 ‘법률’이 생겨났다. ② 그런데 법률은 왜 그와 같이 만들었는가의 ‘입법이유(입법취지)’가 있을 것이고, ③ 나아가 그 입법이유는 그 시대, 그 사회에 있어서의 ‘정치·경제·사회적 배경’에 기초를 두고 있을 것이며, ④ 이러한 배경이 불만족스럽거나 타파되어야 할 것이라면, 그 사회가 ‘어떤 이상’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고뇌하였을 것이고 ⑤ 그러한 고뇌의 밑바닥에는 그 사회의 ‘역사, 철학, 문학 등 인문학’이 자리 잡고 있고 ⑥ 궁극적으로는 ‘세계관 및 신관(神觀)’이 맨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을 터이다.
위와 같은, 여러 스펙트럼 중에서 법률가가 어느 단계까지 고려할 것인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① ‘문언(文言)해석’에 치중하여, 그 법률이 의도하는 1차적이고 외형적인 경제적·사회적 효과만을 염두에 둘 것인지 ②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법률의 ‘입법취지’를 고려하여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약간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것인지 ③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적 소명과 지향하는 이상까지를 고려하여 ‘역사·철학·문학이 담긴’ 법률해석을 할 것인지이다.
법률가들이 문언해석에만 치중한다면, ‘형식적 논리’에 그치기 때문에 인문학적 깊은 고뇌를 할 여지가 없고, 따라서 가치논쟁의 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편리함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따라서 당사자나 일반 국민을 감동시킬 수가 없다. 이러한 법률가는 단순 기능공이고, 법학은 빵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법률해석에 입법취지가 가미되고 시대적·역사적 소명이 덧붙여지며 그 근저에 철학적 고뇌가 녹아있게 되면, 그 법해석은 생동감을 가지고 감동적일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에서 오랜 기간 공부한 비법학 전공자인 어느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머리에 남는다. 미국에서 언론에 보도되는 법원 판결을 읽고 받은 감동을 기억하여, 어느 해 여름 휴가동안 우리 대법원의 판결집을 구하여 읽어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결과는 실망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을 읽고 감동을 받기는커녕, 사람 살아가는 데에 어떠한 교훈도 담겨져 있지 않았고 읽어내는 데에 짜증만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우리 법률가들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첫째, 교육과정 및 임용과정의 잘못이다. 객관성만을 내세워 법률지식 평가에 치중하였고, 인간 및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둘째, 법률가 특히 법관의 정의실현에 대한 열정의 부족이다. 공연히 판결문에 쓸데없는(?) 내용을 담아 논쟁에 휘말려 구설수에 오르느니, 차라리 법률의 ‘문언(文言)뒤에 숨어’ 큰 탈 없이 지내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변화를 주도할 수 없고, 단언컨대 법조인의 장래가 없다.
셋째, 과거 수십 년간 우리의 정치상황은 불행하게도, 법률가가 역사의식, 인권의식, 법치의식에 터 잡아 자기의 철학·가치관·인생관을 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고개 숙이고 세월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해 왔다.
분명 법학은 삶의 본질을 다루는 의미에서의 고급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법률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곳에 근접할 수 있다. 초년병을 지나 경험과 연륜이 쌓여갈수록 생각의 깊이와 내용이 바뀌어 가야 하지 않을까?
법률가의 말이 머리를 넘어 가슴(heart)에 닿지(touching)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일(moving)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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