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를 위한 총잡이까지는 되지 말아야”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민법요론’이란 책이 인기였었다. 방대한 민법이론을 깔끔하게 정리한 책이었다. 그 책의 저자 양삼승은 부러운 존재였다.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수석합격을 한 그는 고시생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도 축복을 받은 것 같았다. 사도법관 김홍섭과 쌍벽을 이루는 청렴의 상징 양회경 대법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못지않은 청렴한 법관이었다. 그가 중견법관이던 시절 뜻밖의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칼라TV가 보편적이던 시절 양판사의 집은 아직도 흑백TV를 보고 살더라는 것이다. 그 시절 부자의 청렴은 스스로의 사상과 의지에 의한 가난이었다.

변호사가 된 후 몇 번 판사실로 그를 찾아갔었다. 굵직굵직한 사건을 담당하는 엘리트 법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만심이나 권위의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인품이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깊은 내면에 흐르는 원액이 배어나오는 것 같은 진정한 겸손이었다. 그로부터 재미있는 그의 소망을 들었다. 돈만 약간 있다면 지혜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면서 좋은 얘기를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삶의 비결이었다. 그 후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실행에 옮겨 봤다. 소설가인 정을병, 이문열, 시인 고은, 도종환 등 많은 분들을 만나 삶과 문학을 배웠다. 성직자들도 만나고 예술가들과도 친하고 언론인들과 사귀었다. 행복한 삶은 결국 향기나는 좋은 인간들과의 얽힘이었다.

2011년 6월 28일 오후 2시경 대형로펌인 ‘화우’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12년 전 판사를 그만둔 그는 오늘의 법무법인 ‘화우’를 탄생시킨 주인공이었다. 대표라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는 작고 소박한 그의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그는 변호사인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했다. 영산법학전문대학의 부총장이면서 장학재단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변호사로서 제일 먼저 떠오른 그의 모습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재판 때의 모습이었다. 변호사였던 그의 입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알고 싶어 물었다.
“심각한 정치상황인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의연하시더라구요. 위로를 하느라고 잘 될 것 같으니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푹 쉬시라고 했죠. 그랬더니 평소 성품대로 농담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도 변호사를 오래 해봐서 잘 아는데 그렇게 긍정적으로 얘기하면 나중에 성공보수를 제대로 못 받는다고 하시는 거예요. 같이 웃었죠. 재판이 끝나고 청와대에서 저녁을 내시더라고. 선물로 몽블랑 만년필 한 개와 작은 감사패를 받았죠. 그때 대통령이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게 비서실에서 감사패를 크게 만들겠다고 그러기에 아주 작게 제작하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거예요. 나중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 온통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때 책상 서랍에 넣을 수 있게 만들라고 했다는 겁니다. 속이 확 트인 재미있는 분이었죠.”

실력과 경험을 갖춘 그가 마땅해 해야 할 사건이었다.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그의 출발이 은근히 궁금했다.
“첫 사건은 어떤 걸 맡았죠?”
내가 물었다. 어떻게 첫 단추를 꿰었느냐가 중요했다.
“처음에 어떤 사건을 가지고 법정으로 갈까 고민했죠. 세상은 당연히 나를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로 여기고 주시하니까 말이죠. 우연히 30대의 부인이 찾아왔어요. 외환위기 때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와 부부가 변두리에서 작은식당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네건달들이 와서 돈을 내라고 행패를 부리면서 여자에게까지 치근덕거렸나봐요. 주방에 있던 남편이 참지 못하고 칼을 가지고 나와 싸우다가 살인을 저질렀죠. 이미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어요. 그 사건을 무료로 하기로 마음먹고 여자에게 물었지. 내가 얼마나 비싼 변호사인지 아느냐고 말이죠. 안다고 그러더라구요. 법정에 나가 첫 변론을 했죠. 돈을 안 받아서 그런지 정말 말이 술술 나오더라구요. 당당하고 말이죠. 어떻게 하든지 그 여자의 남편을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싶었는데 그건 안되더라구요. 재판장이 같이 근무하던 친한 판사였는데 형을 감경은 해줬죠. 과실치사로 죄명을 바꾸어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됐어요.”
세상에 알려진 과장된 전관예우의 현실을 그는 말해 주었다. 되는 건 되고 안 되는 건 안됐다. 나도 20년 변호사를 했지만 안 되는 걸 청탁받고 억지로 되게 하는 판사는 없었다.

“변호사는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항상 묻는 질문이다. 변호사마다 다른 게 신기했다.
“판사를 할 때는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실정법의 정확한 해석을 하는 게 좋은 법률가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변호사를 해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죠. 법해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해야 하는 게 의무인 걸 깨달았어요. 그게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고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수익성이 앞서는 무한경쟁상황에서 로펌의 대표인 그의 입장에서 쉬운 말이 아니다.
“로펌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내가 되물었다.
“로펌의 생리상 수익성에 치중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 혼자 배고플지 말지가 안 되는 상황이니까요. 미국의 경우 로펌을 클라이언트를 위한 총잡이라고까지 하죠. 그렇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변호사 직업윤리가 거기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지난 12년간 로펌을 해보니까 수익과 공익은 서로 모순되는 면이 있긴 있어요. 동시에 양쪽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재벌기업을 위한 로펌이 있으면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로펌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한 로펌에도 파트를 나눠서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기능적인 현실적 접근방법이었다.

“그동안 보기에 안 좋은 변호사의 모습이란 어떤 거죠?”
내가 물었다. 그는 많은 변호사들을 거느리는 인물이었다.
“눈앞의 자기이익에만 몰두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변호사들을 보면 눈에 거슬려요. 조금만 길게 생각하면 좋을텐데 말이죠. 세상에서 법학을 빵을 위한 가장 저질의 학문이라고 욕을 먹기도 하는데 그건 변호사들이 너무 형식 논리적으로 법해석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건과 법조문 뒤에 있는 인간의 심층에 있는 본질을 봐야 해요. 좋은 법률가는 그 깊은 곳에 있는 걸 보는 사람이죠. 제가 요즈음 느끼는 건 나이 50이 넘어서 실정법의 해석만 하는 사람은 좋은 법률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철학 역사 문학 종교에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그의 농축된 한 마디는 새로 태어날 알 속에 있는 예비변호사들에게 귀중한 잠언이기도 할 것 같았다. 그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양회경 대법관의 모습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한국 법관의 표상이던 아버지의 어떤 모습이 지금도 마음 속에 들어있어요?”
내가 물었다. 한국 법조사(法曹史)에 나타나지 않은 귀중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은 모르지만 아버지가 판사시절 우리 집 저녁식탁을 보면 쌀밥에 냉수 그리고 소금인 적도 있었어요. 매일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가시는 도시락을 보면 반찬이 김치였어요. 더러 멸치볶음이 들어가면 특별한 반찬이었죠. 아버지는 굶어죽어도 남에게 부탁을 안 하는 분이죠. 소신을 위해 경제적 어려움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아버지가 유일하게 같이 퇴근해서 집으로 데려와 반찬 없는 밥이라도 함께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분이 김홍섭 법관이었어요. 부산에 살 때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전차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
반듯한 아버지의 행동은 아들에게는 최고의 정신적 유산인 것 같았다. 양삼승 변호사 역시 이미 60대 중반의 나이였다.

“젊은 변호사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내가 물었다. 그는 말할 자격이 있는 훌륭한 법조선배다.
“변호사를 시작할 때 대개 갖는 환상들이 있어요. 열심히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또 돈을 벌면 정계로 나가 권력을 가지고 싶다는 경우도 많죠. 부(富)를 추구하는 건 변호사로서 허망한 꿈이라고 생각해요. 권력도 마찬가지죠. 결국은 살면서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좋은 일 하고 베풀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수밖에 없어요. 변호사의 갈 길은 분명한 겁니다.”
그게 변호사의 도(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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