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사회적 이슈를 법정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좋은 직업이죠”

광주광역시의 법원가 풍경은 무등산 자락에 위압적인 검찰과 법원건물이 마주 보며 버티고 서 있다. 그 언덕 아래 고만고만한 낮은 빌딩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고 사이사이에 역사 같은 오래된 이층주택들이 화장한 여인같이 커다란 변호사 간판으로 전면을 꾸미고 있다. 건물들 틈에 서울에서는 이미 사라진 다방이란 간판이 향수같이 발견된다. 2011년 6월 15일 오후 4시경 나는 법원 정문 앞 경사진 길에 있는 허름한 5층 빌딩의 3층에 있는 강행옥 법률사무소를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로 닳은 계단은 낮인데도 어둠침침했다.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장인 듯한 남자가 가난기가 풍기는 60대 여인 두 명과 남도 사투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요의(尿意)가 느껴져 화장실을 물었다. 사무장이 뒤쪽 알루미늄 샷시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문을 열고 콘크리트 바닥을 몇 걸음 가니까 반수세식 대변기와 소변기가 함께 보이는 화장실이 나타났다. 성장하면서 몸에 익어왔던 주변의 풍경이었다. 서울 중심가의 번쩍이는 고층빌딩 속의 번들거리는 대리석 로비에 미녀 안내원이 배치된 대형로펌과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돌아온 나는 ‘변호사실’이라는 아크릴판이 붙어 있는 방 안으로 안내됐다. 광주지방변호사회장인 강행옥 변호사가 나를 맞이했다. 눈빛이 만만치 않은 강인한 인상이었다. 소파에 앉아 몇 마디 덕담을 나눈 후 바로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갔다.
“20여 년 해 온 변호사란 직업을 어떻게 정의하죠?”
그 세월 동안 해온 나름대로의 결론을 듣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직업에 만족합니다. 시골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변호사가 됐어요. 그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고 아이들 둘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나이 아흔 살이 다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었죠. 사법연수원을 다닐 때 교수님으로부터 변호사란 굶주림은 면할 수 있는 직업이지만 부자가 되기는 힘든 직업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하면 생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직업이죠. 감사하죠.”
“변호사의 특징이란 뭐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직업마다 독특한 성질이 존재했다.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니까 힘 있는 사람들한테 대항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영광의 원전문제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했어요. 남들이 감히 못 하는 걸 사회적 이슈로 그리고 법률문제로 만들 수 있는 그 자체가 변호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직업관에는 투쟁적 성격이 들어 있었다. 그 배경을 알고 싶어 변호사가 된 과정을 물어보았다.
“궁벽한 농촌에서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광주로 나와 지방대에 진학했습니다. 요즈음 등록금을 내리자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저같이 가난한 시골 출신들은 지방대를 졸업하기도 경제적으로 벅찼습니다. 전남대 1학년 때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했죠. 군인들의 무력진압작전이 시작될 무렵 총을 들 시민군을 모집할 때 도청에 있었습니다. 그때 고립된 광주시민의 지도자가 되어 활동 하시던 이기홍 광주변호사회 회장을 보면서 존경스러웠죠. 자연스럽게 나도 저런 인권변호사가 되어 살자는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지금은 제가 광주변호사회 회장으로 있고 이기홍 변호사님은 원로로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광주지방변호사회의 회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문득 눈길이 바닥으로 갔다. 변색된 낡은 인조양탄자가 깔려있다. 그의 소박한 삶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전두환 정권시절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광주는 홍남순 변호사가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이기홍 변호사가 그 맥을 잇고 있었다. 강신석 목사가 운동가로 정력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다른 젊은 변호사 20명과 함께 매주 월요일이면 YMCA에 모여 활동을 했다. 주부와 시민을 가르치고 법률구조활동을 전개했다. 너무 몰려드는 사람이 많아 미처 밥도 먹지 못하고 밤 늦게까지 일을 할 때도 잦았다. 그때부터 시작한 국선변호를 20년이 넘는 지금까지 쉬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제가 변호사를 시작하기 전에 선배로부터 냉소적인 변호사 직업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는 변론을 잘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판사들은 그런 변호사를 오히려 싫어한다는 거죠. 그러니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였어요. 브로커를 사건사무장으로 앉히고 적당히 판사에게 가서 청탁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거였죠.”
그런 행태도 현실 변호사 세계에 존재하는 혼탁한 한 흐름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개업 초기에 지역의 변호사 사회에서 사건 수나 수입으로는 꼴등에 가까웠죠. 좀 바보 같았어요. 지방에서는 법원에 있던 부장판사가 나오면 전관예우로 몇 달 동안은 형사사건이 씨가 마르는 형편이었죠. 특히 지역은 동문관계나 이런 인연으로 끈끈하게 움직입니다. 브로커를 써야 그나마 찌꺼기 작은 사건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죠. 그 일을 하는 사건사무장을 쓰지 않고 버텼습니다. 정도를 걸으려고 애를 썼는데 수입이 없을 때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변호사는 손해를 보고 후배들이 돈 많이 번 사람만 성공으로 인정할 때는 씁쓸했어요.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를 본 거죠. 돈 많이 번 사람이 감투도 독점했습니다. 나름대로 내가 할 일을 찾았죠. 최루탄에 맞아 손가락이 잘린 학생을 위해 열심히 증거들을 찾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어릴 적 성폭행을 당했던 김부남 여인이 몇십 년 후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에서 그 힘들고 처참했던 여인을 변호해줬죠. 변호사는 사회적 이슈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소외된 약자들의 호소에 둔감해서도 안 됩니다. 나도 그들처럼 약자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는 거죠. 내가 힘든 사람을 도와야 남도 내가 고소를 당하고 어려울 때 도와준다고 봅니다. 그래도 요즈음은 많이 달라지고 있어요. 변호사로 제대로 살아온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가 됐다고 할까요?”
그의 말 중에는 전관예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보였다. 그에게 광주지역의 법원 분위기에 대해 물었다.
“우리나라는 지역의 향판 제도가 있는데 제가 지난 20년간 지내보면 폐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판사들이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하면 대책 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기소방침이 결정된 선 판사도 의식한 것 같았다. 판사가 자기와 친한 특정 변호사만 밀어주는 게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지방의 판사는 법원에서 나와도 새끼변호사 한 명 정도를 두고 사무실을 차려 사건을 휩쓸어 버리죠. 가진 사람은 더 가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게 지역의 변호사 사회입니다. 없는 변호사는 직원 월급날이 돼도 사건 하나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변호사들도 생기고 있습니다. 부인들이 공무원이나 선생을 해서 보태면서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집을 팔고 전세로 살면서 그 차액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변호사도 봤어요. 그나마 변호사로서의 수명도 길지 않아요. 자기 또래의 판사들이 없어지면 변호사도 사건이 들어오지 않아요. 사무실 문을 닫아야 하는 형편이 되는 거죠. 그분들이 노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도 문제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50을 넘어섰는데 짧으면 5년 길면 10년 정도로 직업적 수명이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변호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그는 내년부터 로스쿨생들이 변호사로 쏟아져 나오는 사실을 떠올리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인 경쟁사회였다.
“젊은 판사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내가 물었다. 그는 지역의 변호사대표로 말할 위치였다.
“노파심인지 몰라도 과외공부로 명문대학을 가고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가 된 분들을 보면 저같이 어렵게 큰 사람하고는 가치관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눈물을 흘려봤기 때문에 아픔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싸울 때도 마음이 통했습니다. 선불금에 잡힌 성매매 여성들을 위해 법정에 서 봤습니다. 미리 돈을 줘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게 포주들의 수법이죠. 젊은 판사 중에는 돈을 미리 받고 튀어 버렸으니까 사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고 법조문이나 판례의 형식논리 이외에는 머릿속에 박힌 게 없는 거죠. 그럴 때 답답했습니다. 또 원전의 피해에 대해 나름대로 많이 공부하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지역의 주민을 위한 거죠. 그런데 판사는 기존의 판례 몇 개를 짜깁기해서 패소 판결을 선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민의 피해에 대한 깊은 사고가 결여된 것 같았습니다. 귀족적인 법관은 재판받는 서민을 자기와는 다른 부류로 여기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죠.”
“남은 인생은 뭘 하면서 살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 마지막에 내가 묻는 질문은 버킷 리스트다.
“그래도 변호사란 직업이 좋은 게 집 한 채와 조그만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산을 좋아했습니다. 백두대간부터 시작해서 여러 산을 다녔습니다. 천 개의 산을 올라가 봤으면 하는 게 꿈입니다. 그리고 인생 말년에 내 땅에 숲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무를 한그루 한그루 심다가 가는 거죠.”
그의 소박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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