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 열전 ④

법관양성소 1회 수석졸업생 함태영의 생애


1. 약 력

함태영(咸台永)은 1873년 함경북도 무산 출생으로 1884년 서울에 상경하여, 사숙을 전전 한문을 배우고, 1895년 4월 법관양성소에 입학 같은 해 11월 6개월 과정을 졸업생 47인 중 수석으로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를 거쳐 검사가 되었고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1908년 10월 8일 대심원판사를 역임하면서 일관되게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그대로 과시함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 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법관양성소 1895년 11월 제1회 수석졸업생(47인 중)인 그는 법조직(관직)에 14년간 종사하고 이후 변호사 개업사실도 전혀 없었다(그는 일제 때인 1912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이에 불응하여 휴직하고 같은 해 7월 21일자로 퇴직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어 실제 재직한 바 없다). 그는 아버지가 기독교 장로여서 그도 종교운동에 힘써 왔으며 3·1운동 당시 평양신학원생이었고, 징역 3년의 형선고를 받고 2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고 석방된 후 위 평양신학원을 나와 목사가 되어 종교운동에 계속 투신했다. 8·15 조국 광복 후 1949년 심계원장,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내고 이승만 대통령 때인 1952년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부통령으로 재직하여 국정운영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함태영은 1964년 2월 25일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 강직한 검사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항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황제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1898년 11월 4일에 이상재(李商在) 등 독립협회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게 하고 11월 5일 독립협회를 혁파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이 사건을 담당한 고등재판소 함태영 검사는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이상재 등 17인을 태(笞) 40에 처하는 경미한 판결(1898년 11월 10일 선고)을 받게 하고 면죄석방케 하여, 고종황제의 엄치하라는 명령에 항거하였다고 그는 파면당하였다.

당시 독립협회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가 중심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초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창립되어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계몽운동 등을 하였다.

이승만(대한민국 초대대통령)도 당시 독립협회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로 1899년 24세 때 옥수(獄囚) 강성형(姜聲馨)을 초출(招出)했다는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는데 감옥의 담을 뛰어 넘어 도망하려다가 붙잡혔다.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장 홍종우(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을 상해에서 살해한 자)로부터 탈옥은 유죄, 그 나머지 죄목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이나 태(笞) 100, 종신징역선고를 받고 복역 중 1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04년 8월 9일 고등재판소 함태영 검사의 도움으로 대사면되어 5년 옥살이 하고 석방되었다고 한다.

함태영은 위 이상재의 독립협회사건 담당검사로 알게 되었는데 기미 3·1 독립운동을 같이 모의하고 후일을 위해 이상재는 3·1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할 지도자로 합의한 것, 이승만에게 대사면을 받게 하여 석방하게 한 인연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권하에 함태영이 심계원장 부통령에 피선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종교계와 국정에 기여한 공로

함태영은 또한 우리 나라 법조계에서도 최고 원로요 성직자로서 교리 선포와 민중 계몽에도 반생 이상을 헌신하셨고 구순을 넘긴 불편한 몸으로 신학대학을 손수 창설하여 후배 육성에 이바지도 했다.

그는 심계원장(현 감사원장) 당시 “송사리는 두고 고래를 잡아야 한다”고 김완섭(金完燮) 차장(변호사 출신)에게 누차 다짐하면서 독려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 나라 관기쇄신(官紀刷新)에도 한 기틀을 마련해 놓은 공로가 크다. 그는 또한 소신(所信)을 굽힐 줄 모르는 의지의 인물로서 부통령 당시 마지막엔 이승만 박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국정운영에 소신껏 헌신하고자 하여서이기 때문이었다.


4. 함태영의 3·1운동 회고담

1954년 3월 1일 함태영의 35년 전 평양신학원의 학생으로서 주모자로 활동한 회고담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2월 초순부터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씨 댁에서 최린(崔麟),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씨 등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며 이 운동을 거족적으로 행하기 위하여 천도교에서는 기독교와의 합류를 요청케 된 것인데 당시 나는 이상재(李商在) 씨로부터 계획의 치밀성을 듣고 전적으로 합작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천도교는 국내조직을 담당하고 기독교는 외교를 책임지고 계획을 추진하던 중 각지로부터 우국지사가 자진 참가하였으며 직접으로 독립운동에 참석한 주모자는 48인으로서 나중에 재판을 받았다.

즉 당시 33인이 민족대표로 선언서에 서명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기 15인을 선출하여 30인으로 하기로 하였었는데 그 후 불교를 대표하여 백용성(白龍成), 한용운(韓龍雲) 씨가 참가를 요청하여 왔으며 또한 원산에서 감리교회 목사로 있는 정춘수(鄭春洙) 씨가 도장을 보내어 서명케 해달라고 해서 우연히 33인이 된 것으로 처음에 인쇄한 선언서에는 30인이 민족 대표로 되었던 것이다.

3·1 독립운동의 결과로 일시에 많은 지도자를 잃게 되는 경우 그 뒤를 이어 뒷수습을 하고 새로이 민족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어 갈 지도자로 월남 선생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합의함으로써 월남 이상재 선생은 3·1운동의 일선에는 직접 나서지 않게 되었고 함태영 자신도 3월 1일 독립선언 후 투옥된 사람의 가족을 원조하여 주는 한편 독립운동을 계속 강렬하게 할 목적으로 독립선언서에는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나 독립운동에 실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선언은 3월 1일 하오 2시를 기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는 2월 27, 28 양일간 보성사(普成社) 인쇄소에서 주야로 인쇄하여 3월 1일 하오 2시를 기하여 민족자결을 세계 만방에 엄숙히 선언하였다. 서울에서는 33인 중의 27~28인이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선언하고 일경에 전화로 알린 다음 태연히 포승을 받았다.

나는 3월 2일 체포되어 3년간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체포되기 직전까지 현순(玄楯)을 상해로 밀파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독립선언서와 미국 대통령과 열국 대표들에게 모든 서류를 발송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배부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일본 정부에도 전달하였는데 총리대신에게는 임규(任圭), 경무총감에게는 안세환(安世煥) 씨가 직접 전하고 그 자리에서 일본관헌에게 태연히 포승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악독한 왜경은 이상재 선생이 이 운동에 관계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속단에서 이옹마저 구속했는데 함태영은 “다른 감방에 계시던 월남 이상재 선생을 우연히 (변소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선생은 나를 보시고 ‘나는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하시므로 ‘모른다 부인하여 주십시오’ 했던 것이다.” 결국 이상재는 검사국에서 6개월 후 석방되었다.

/ 김이조 서울지방변호사회·변호사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