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임영화

36년 만의 재심 무죄


무죄(無罪)! 그 한 마디를 듣자 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마침내 36년 만이다. 1972년 9월 춘천에서 발생한 파출소장 딸 성폭행 살인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졌던 그 사건이다. 36년 동안 한 번도 진실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정원섭 씨(73세)에게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선고된 것이다. 내게도 그 36년 속에 10년이 겹쳐 있으니, 나도 눈물이 날 수밖에… 그와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찬운, 이백수, 임영화 변호사 3명과의 첫 만남이었다. 초라한 노인네가 세월 탓에 누렇게 빛바랜 형사기록을 들고 왔다. 이미 기록 보존연한을 따질 필요도 없을 그런 시기에 1972년 사건 기록이 놓여졌다.

그 기록은 고(故) 이범렬 변호사님이 20년 이상 보관하다 돌려준 유품(遺品)이었다.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포기하지 마라며 돌려준 사본이었다. 그분은 1971년 사법파동으로 판사의 옷을 벗고나서, 변호사로서 형사 변론의 일가를 이루고 떠난 분이다. 1973년 국선변호인을 자청하여 항소심과 상고심을 변론했었다. 그분이 ‘시민과 변호사’ 1994년 7월호에서 ‘소금에 절인 잉어’란 글을 통해 “그 사건만 생각하면 창자가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고 했을 만큼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잘못된 사건이었다.

정원섭 씨는 1972년 당시 내무부장관의 시한부 체포령 마감날 살인범으로 발표됐다. ‘10월 유신’이 선포된 그 달이다. 경찰들은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특진 포상을 받았다. 정교(精巧)한 우연(偶然)의 일치(一致)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우연이 고문(拷問) 조작에 의한 필연(必然)이었음이 마침내 36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그 사건은 공안사건도 아니었고 시국사건도 아니었다. 그저 ‘돈 없고 백 없는’ 평범한 시민의 일반 형사사건이었다. 그래선지 평범한 일반시민에게도 사법적 명예회복의 길이 열려야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열정만큼이나 세월의 더께로 인한 막막함도 밀려 왔다. 우선 공식적으로는 판결문 외엔 원래 기록이 없어진 지 오래고 남은 건 사본뿐이었다. 복사기도 거의 없던 시절이라 현장검증 사진 몇 장만 복사됐고 나머진 타자기나 손으로 옮겨진 기록이었다. 유죄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사유도 매우 엄격하고, 수사권도 없는 변호사들이 관계인들을 만나 조사하기도 어려웠다. 남은 건 오직 과거 증인들의 양심고백뿐이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역할을 나눠 기록을 재분석하고, 사건 발생지 춘천을 다녀오고, 피해자를 처음 부검했던 의사를 찾아 진주를 다녀왔다. 옛날 신문기사들의 마이크로 필름도 살펴봤다. 어려운 수소문 끝에 과거의 증인들을 찾아냈다. 그중 과거의 잘못된 증언을 바로잡는 양심고백을 청취하기도 했다. 그 사이 훌쩍 1년이 지났다.

마침내 1999년 처음 재심을 청구했다. 3개 심급 중 어디로 할지 문제였다. 시간과 공간의 현실적 제약 때문에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청구서를 냈다. 그 뒤 2년이 흘렀다. 법원은 여러 고심 끝에 “비록 사본이지만 유불리(有不利)한 내용들이 다수 기록돼 있어 그 진실성이 담보된다”고 전제하면서도 “일부 증언 번복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청구기각결정을 했다. 대법원에 즉시항고 후 추가로 범인의 치모(恥毛) 혈액형이 A형이었다는 감정결과를 보도한 1972년 신문기사와는 달리 정원섭 씨는 B형이라는 논증(論證)도 했지만 기각되었다.

그때 허탈한 내게 정원섭 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면서 오히려 내게 힘내라고 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난 잊을 수 없다. 일반시민의 사법적 명예회복의 길이 이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그 사건을 잊고 있었다. 재심이 대법원까지 갔다가 끝났었으니까…

그러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정원섭 씨는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최후의 문을 두드렸다. 또 2년이 흘렀다. 일반형사사건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법률에 의한 조사권에 기해 고문경찰과 사건 관계인들을 망라한 조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진실규명 결정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통지되었고 이의신청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결국 이의신청 없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2008년 2월 제1심을 담당했던 춘천지방법원에 다시 재심청구를 했다. 1999년 재심을 항소심에 청구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왜냐하면, 형사소송법은 제1심 판결에 대한 재심기각결정 후에 다시는 제1심에 재심을 청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차 재심에는 정원섭 씨의 신학교 후배인 정영대 변호사도 참여했다.
춘천지방법원은 과거 경찰관 2명과 증인 2명을 심문한 후 재심개시결정을 하였다. 그때 검찰은 즉시항고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법원은 심층적인 본안 심리 끝에 2008년 11월 28일 무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현재 검찰은 법적 안정성과 숨진 피해자 가족의 입장을 고려하여 다시 한 번 법적 판단을 구하겠다는 이유로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실로 평범한 일반시민의 ‘진실찾기’는 지난(至難)하다. 그러나, 난 믿는다. 진실의 힘이 결국 승리할 것임을! 그래야 평등(平等)이고 민주(民主)고 상식(常識)이니까…

서울회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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