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여성변호사회 회장 취임 예정 왕미양 변호사 인터뷰

전북 정읍 '개성 왕씨' 집성촌서 나고 자라... 2남 2녀 중 셋째

"판·검사 됐으면"... 어머니 당부에 어려서부터 '법조인' 꿈꿔

고교·학부 시절 내내 장학금… 졸업 후엔 사법시험 준비 몰두

연수원 수료 후 성남 개업… '여성의 전화'로 공익활동 첫 발

"한국여변, 여성·아동 인권문제 다 사라질 때까지 존속해야"

"능력 있는 여성변호사 교류 강화"… 연대하는 리더십 추구

왕미양(사법시험 39회) 변호사는 1968년 전북 정읍시 옹동면에 있는 한 작은 농가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둘,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었다. 옹동면에는 고려 왕조를 개창한 태조 왕건의 후예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 많았고, 한 집 건너 한 집이 같은 성일 정도로 왕씨가 많았다고 한다. 

"개성(開城) 왕씨 집성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는 왕씨 성(姓)이 특이한 줄 모르고 지냈습니다. 마을 분들 상당수가 왕씨였기 때문이지요. 대학에 진학해 도시로 나오고 나서야 왕씨가 희귀성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교수님들이 질문하고 답할 사람을 선택하려고 출석부를 펴들면, 여지없이 걸려서 고충이 컸어요. 그런데 사법시험 합격 후 변호사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띄고 확실한 인상을 남길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산업화 이전 시골의 농촌 마을이 다 그러하듯, 왕 변호사는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가난한 농사꾼이었고, 제대로된 교육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가 뜨면 쟁기를 들고 논밭으로 나가 해질녘이 되서야 돌아왔다. 두 분은 평생 흙을 만지며 '농투성이'로 사는 걸 운명처럼 여겼다. 하지만 왕 변호사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딸에게 남다른 포부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에게 '엄마는 내가 커서 뭐가 되면 좋겠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판·검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응, 알았어. 그러면 나 판·검사할게'라고 답했습니다. 70년대 시골에서는 법조인이 최고의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누구나 고시 합격을 선망하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그 대화는 제가 더 넓은 세상에서 대접을 받으며 살기 원하는 어머니의 소망이 그대로 담겨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저는 어렴풋하게나마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궁벽한 시골에서 여자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거나 일부는 실업계 야간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동창들이 많았다.

다행히 성적이 우수했던 왕 변호사는 태인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입학해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87년에 전북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철권 통치를 자행하던 전두환의 5공화국이 호헌철폐와 6월 혁명으로 무너진 바로 그 해였다.

"대학에 들어간 해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6.29. 선언이 있기 전까지 대학가는 진한 투쟁의 연속이었어요. 신입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야 할 캠퍼스는 매캐한 최루가스와 성난 학생들의 구호가 메웠습니다. 저도 간간이 시위에 참여했지만 앞장서서 동참하지는 못했습니다.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내가 너무 비겁한 것 아닌가'라고 자책하곤 했지요."

잦은 휴강으로 대학 강의가 파행적으로 운영됐지만, 왕 변호사는 학점 관리에 각별히 신경 썼다. 고향 부모님의 형편을 알기에, 그는 장학금을 꼭 받아야 했다. 다행히 법학 공부가 왕 변호사의 적성에 맞았다. 그렇게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무사히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왕 변호사는 "대학을 졸업하니, 더 이상 장학금 받으려고 마음 졸이며 공부하지 않아도 돼서 내심 후련했다"고 회고했다.

선후배들은 졸업과 동시에 법원·검찰 공무원이 되거나, 취업을 선택했다. 하지만 왕 변호사는 한 번도 기업에 입사원서를 낸 적이 없다. 어릴 적 꿈꾸던 법조인이 되고자 굳게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왕 변호사는 대학을 마친 뒤 홀로 고시촌에 입성해 사법시험 공부에 몰두했다. 마침 직장생활을 하던 오빠가 생활비를 쪼개어 지원해 줬다.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왕 변호사는 곁눈을 팔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신림동에서 만난 한 고시공부 선배님은 누가 봐도 실력이 좋았습니다. 모르는 게 없었고,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변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야말로 척척박사였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계속해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저는 중간에 합격해 고시촌을 떠났지만, 그분은 끝까지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실감 나더군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왕 변호사는 신혼집에서 가까운 경기도 성남에 둥지를 틀었다. 개업지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데다 여성이다 보니, 홀로서기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왕 변호사가 개업할 무렵에는 여성 변호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섬세한 업무처리로 차근차근 의뢰인들과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왕 변호사는 지역 여성계와도 긴밀하게 교류했다. 그의 첫 번째 사회 참여는 '여성의 전화'였다.

"성남에 '여성의 전화'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제 발로 찾아가 무료상담을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돕고자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때는 보수를 받기는커녕 회비를 내면서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이 계기가 되어 지역 내 여성단체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서초동으로 사무소를 옮긴 뒤에도 서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틈틈이 상담과 강연 활동을 병행해 왔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건을 하나 말해 달라고 하자 "당시만 해도 성남에 집창촌이 존재했다"며 "성착취 노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성들을 상담을 통해 구제했던 기억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이후에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위원,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선배 변호사들에게 공익 활동에 관한 다양한 가르침을 전달받았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변함이 없는 변호사의 사명은 인권 옹호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국민의 권익 보호와 인권보장을 위한 업무를 맡는 직역입니다. 이 때문에 국가도 변호사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기여와 봉사가 필요합니다."

왕미양 변호사는 이달 제13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1991년 첫발을 내딛은 여성변호사회는 1988년 설립된 ‘여성법우회’를 모태로 한다. 여성법우회는 국내 최초의 여성 법조인인 이태영 변호사를 필두로, 50여 명의 국내 여성변호사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단체다.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여성변호사회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했던 성차별을 극복하고, 곳곳에서 여성과 아동 인권을 높이는 역할을 도맡아 수행했다. 2012년 사단법인으로 전환했다. 이후 아동학대 피해자, ‘코피노(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자녀)’, 미등록 이주 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익소송 등을 수행하면서 활동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성변호사 숫자가 전체 변호사의 절반을 넘으면 여성변호사회가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곤 합니다. 하지만 여성변호사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비추어볼 때 여성변호사회의 존립은 변호사 숫자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성·아동 인권 분야는 섬세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성 변호사들이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아동 인권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시대가 오면, 그때에야 비로소 여성변호사회도 할 일이 없어지겠지요."

차기 회장으로서 왕 변호사가 생각하는 현재 여성변호사회 화두는 '네트워킹 확대'다. 왕 변호사는 "네트워크 부족으로 취업과 변호사 활동에서 열위에 처하는 사례가 의외로 많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제가 경험한 여성 변호사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역량을 갖춘 능력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활동 영역을 확장하지 못했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이러한 '능력자'들 간의 적극적인 만남과 교류를 주선하는 장(場)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선배와 후배들이 서로 만나 편안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대외적으로는 다양한 여성 전문인 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할 계획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함께 봉사할 수 있는 활동도 추진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여성변호사회가 다종다양한 여성 전문인 단체들을 리드하는 역할을 맡는 게 왕 변호사의 포부다.

"여성의사회, 여성한의사회, IT여성기업인회, 여성건설인협회 등 다양한 직종에 산재돼 있는 조직들이 여성변호사회와 손을 잡고 싶어 합니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사회 활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이지요. 여성변호사회가 이러한 조직 사이의 연대를 형성하는 리더십을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왕 변호사는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사회의 등불 역할을 앞으로도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 달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 역대 회장님들이 쌓아온 업적을 중단 없이 이어가면서, 어려움에 처한 여러 분들께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여성변호사회는 여성변호사들만을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음지(陰地)에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약자들의 권익을 높이는 창구입니다. 대한변호사협회나 지방변호사회들도 여성변호사회를 ‘벌린 팔’로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변호사단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활동을 여성변호사회가 대신 수행한다고 생각하며 많은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임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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