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운 변호사
조자운 변호사

한나아렌트(Hannah Arendt)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만큼이나 빈번하게 오역되는 말이 또 있을까?

‘악의 평범성’은 1961년 유대인 대량 학살의 책임자로 체포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전범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였다. 우리가 만나는 ‘악’이 사실은 ‘평범한 존재’ 그 자체이지 대단히 두렵고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는 취지의 이 조어는, 한나 아렌트의 의도와는 다르게 잔혹한 범죄자들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자신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려는 방편으로도 쓰여 왔다. 한나 아렌트가 1964년 독일 다스 테마(DAS THEMA)와의 인터뷰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의 의미를 직접 밝히기까지 했음에도, 이 표현은 잔인한 살인범이 사실은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거나 순수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는 류의 서사를 부여해 주는 데에 쓰였다.

나는 이따금 이것이 그저 오해일까 아니면 의도된 오역일까 궁금했다.변호사로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오해와 오역은 퍽 일상적이었다.나는 이 수많은 오해와 오역 사이에서 우리가 추구한다던 그 단 하나의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Heidegger)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을 통해 ‘이해’ 한다는 착각에 대해 지적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을 내 사고의 영역 안으로 들여와서 분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 나의 틀에 맞추어 다시 조립해 나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사고의 틀을 벗어난 이해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우리는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말하는 ‘이해’란 즉, 대상을 ‘왜곡’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무엇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철학자의 말은 슬프기도 하고, 위로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오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뿐이다.

/조자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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