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를 보자. 법 앞에 문지기가 있다. 시골사람이 와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문지기는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도 또 다른 문이 있다며 막아선다. 문지기가 마련해준 의자에 앉아 마냥 기다린다. 날이 가고 해가 갔다. 시골사람은 늙고 병이 들었다. 문지기에게 가슴에 품고 있던 질문을 한다. 자기 말고 이 문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며 이유를 물었다. 문지기가 황당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것은 당연하오. 이 문은 오직 당신을 위해 마련된 문이오. 그대가 죽으니 이제 문을 닫겠소.”

21세기 대한민국의 재판 절차는 어떨까. 참을 수 없는 억울함으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건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대한변협 2022년 회원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약 90%가 최근 5년간 재판 지연을 경험했다고 호소했다. 원인이 뭘까. 법원의 인사시스템과 사명감 부족을 탓하지만 사법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법률정보 대중화와 권리의식이 높아지며 실체적,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국민 요구가 거세졌다. 재판은 정의 구현 외에도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 진행이 중요해졌다. 판사는 불필요해 보이는 절차까지 진행하며 놓치는 주장과 증거가 없는지 살핀다. 판결문을 납득하기 쉽게 다듬는데 많은 시간을 쓴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이유도 변명이 될 수 없다. 헌법이 국민에게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외국이 시행하는 변론준비기일 의무화를 도입하자고 한다. 법원과 당사자가 재판에 앞서 재판절차를 협의하고 방향을 정하는 제도다. 반론도 있다. 재판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무의미한 서면공방을 야기하거나 재판지연 전략에 악용될 수 있다. 간단한 사건조차 1회 기일로 결심하기 어렵게 되는 등 오히려 재판지연을 가져올 수 있다. 법정에서의 생생한 공방을 통해 진실을 가리는 직접, 구술, 변론주의에 부합하지 않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변론준비기일 의무화를 도입하자. 재판을 시작할 때 당사자 주장을 담은 서면 제출일정, 증인과 서증 등 입증순서와 시간계획을 미리 정한다. 단점을 피하고 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도 같이 정비해야 한다. 민사소송법 제135조 재판장의 지휘권을 강화하여 당사자의 무의미한 서면공방 등 재판지연을 막아야 한다. 소가, 사건의 난이도 등 기준을 마련하여 변론준비기일 의무화 대상 사건을 법령으로 정해 간단한 사건을 제외하는 것도 좋겠다.

재판 장기화는 국민이 생업에 종사할 시간을 뺏기고 ‘마음고생 몸고생’을 하게 한다. ‘지연된 정의’는 국민의 피해로 직결되고 승자도 패자로 만드는 악순환을 낳는다.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넘어 사법부의 권위와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 사법부의 신뢰 훼손은 바이러스처럼 다른 재판절차와 판결 불신으로 이어지고 국가에 대한 불신과 위기로 직결된다. 변론준비기일 의무화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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