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협·사법정책연구원, '재판 장기화와 해법' 세미나

"예측가능한 재판은 만족감 커… '신모델' 재도입을"

"간단한 사건도 1회 기일서 결심 못하는 등 문제도"

△ 전휴재 교수가 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공동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 전휴재 교수가 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공동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민사재판에서 변론준비기일을 필수적으로 거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소송절차의 예측 가능성을 보장해 재판 장기화에 따른 국민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무의미한 서면 공방 등으로 오히려 소송 지연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김영훈)와 사법정책연구원(원장 박형남)은 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강당에서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을 주제로 공동 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전휴재(사법시험 38회)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민사재판 지연의 원인과 개선방안'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민사소송절차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과거 삼성전자와 애플 간 특허권 분쟁에서 9개 나라에서 열린 재판에 모두 참여했던 애플 임원이 담당 변호사에게 '언제 끝날지 예측이 안 되는 이런 재판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이렇게 분산·표류형 심리 방식을 따르는 나라는 현재 우리나라 외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요 국가에서는 법원과 소송 당사자가 사전에 재판 절차를 협의하고 심리 계획을 수립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며 "미국 연방법원은 변론기일 전 회합을 열고 향후 서면 제출 일정, 증인과 서증 특정 등 다양한 사항을 논의하며, 영국과 캐나다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재판 진행 순서와 시간 계획 등을 수립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일한 재판 기간이라도 소송 당사자가 앞으로 기일이 몇 번 열릴 것이고, 증인은 누가 나올 것인지 등 재판 절차를 예측할 수 있다면 절차적 만족감이 훨씬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변론준비기일을 의무화하는 방식으로 민사소송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2000년대 초에 한 차례 도입됐다가, 지금은 법 개정으로 사라진 이른바 '신(新)모델'을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2002년 민사소송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변론에 필요한 시간, 준비서면 제출 횟수·분량·기간 등을 법원과 당사자가 협의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가 마련됐었다"며 "법원의 의무가 아닌 재량이었다는 점이 외국 제도와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나 2008년 직접·구술주의 실현을 이유로 '변론기일 원칙, 변론준비절차 예외' 구조로 민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이같은 '신모델'이 후퇴했다"며 "2002년 민사소송법처럼 변론준비기일을 원칙으로 하면서 절차 협의와 심리 계획 수립을 의무화하도록 민사소송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전 교수는 당사자 동의에 기반한 신속절차 도입 △항소심 절차 변혁 △온라인 법원으로의 전환 등을 개선방안으로 제시했다.

△ 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공동 세미나에서 토론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 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공동 세미나에서 토론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신모델' 도입 주장에 대한 반론과 질의가 나왔다.

정찬우(사시 41회)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당시 신모델은 간단한 사건도 1회 변론준비기일에서 결심할 수 없다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며 "무의미한 석명준비 명령과 서면공방을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소송지연을 초래한다는 비판도 받았다"고 지적했다.

또 "계획 심리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협조가 필수"라며 "당사자들이 잘 협조할 것인지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히 전관 변호사들이 대거 포진한 대형로펌은 필요에 따라 다수 증인 신청, 관련 사건 대기 추정 요구, 분할 변제 등 여러 소송지연 전략을 펼치기도 한다"며 "변호사들 중에는 기일변경 신청이나 증거신청이 불허되면. 돌발적으로 기피 신청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전 교수는 "신모델은 약 10년간 준비를 거쳐 도입됐는데 너무 일찍 좌초돼 아쉬움이 많았다"며 "도입 초기 드러났던 한계나 문제점도 분명 있지만, 이를 재검토하면서 제도를 개선할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답했다.

박건우(사시 50회)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현행 민사소송법과 민사소송규칙에 의해 변론준비절차를 활용할 근거도 충분한 것 같다"며 "그럼에도 변론준비기일이 잘 활용되지 않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질의했다.

전 교수는 "2008년 민사소송법 개정이 법관들에게 큰 신호를 줬다고 생각한다"며 "법관은 민사소송법에 따라 재판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변론준비절차를 임의·예외적 절차로 만드는 것으로 법이 개정돼 변론준비기일이 사실상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되지 않는 현상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영창(사시 38회) 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주제 발표를, 문중흠(사시 50회) 서울행정법원 판사, 고유강(사시 51회) 서울대 로스쿨 교수, 홍은기(사시 48회) 서울중앙지법 판사, 허중혁(변호사시험 1회) 대한변협 부협회장이 토론을 했다.

/권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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