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주광일 변호사 인터뷰

유년시절 6.25 전쟁… 4.19, 월남전 등 굵직한 현대사 관통

만 22세 사시 합격 '최연소 검사' 임관… 27년간 검사 생활

한평생 시 쓰며 살아... 故이어령 교수와의 사제 인연 주목

"전관예우 바란적 없어… 바르고 지식인답게 살아야" 조언

"모천(母川)으로 회귀한 연어의 은빛 비늘"

지난해 작고한 故 이어령 교수가 작성한 어떤 시집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2021년 2월에 쓰여졌으니, 이 교수가 생전 마지막으로 쓴 서문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시집 이름은 '유형지로부터의 엽서(한강 刊)'다. 저자는 독특하게도 30년 넘게 검사를 지낸 주광일(사법시험 5회) 변호사다. 이어령 교수와 그는 60여 년 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당시 주광일 변호사는 경기고 2학년, 이어령 교수는 20대의 의욕 넘치는 국어교사였다.

"학창 시절부터 늘 시를 썼습니다. 친구들도 다 저를 시인이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문예반 활동을 했는데, 당시 지도 선생님이 이어령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은 제 시를 읽으시고 '너는 국문과에 가서 꼭 문학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법대를 선택했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저 녀석은 문학을 했어야 했는데...'라며 늘 아쉬워 하셨습니다. 뒤늦게나마 제가 쓴 시집을 보내드렸더니 건강이 좋지 않으신 와중에도 흔쾌히 서문을 써주셨습니다."

이어령 교수에 관한 에피소드를 묻자, 그는 마치 학생으로 돌아간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1959년, 그러니까 선생님이 26살이셨을 때였습니다. 그 해 첫 저서를 출간하셨는데 제목이 '저항의 문학'이었어요. 어느 날 저한테 책을 100권 가량 주시더니 친구들에게 좀 팔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남김 없이 팔아드렸습니다. 선생님은 고맙다면서 사모님과의 결혼 1주년 파티에 저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지금 종각 맞은편에 있던 한 양식집에서 함께 식사했는데, 그때 생애 처음으로 포크를 들고 양식을 먹었습니다(웃음)."

주광일 변호사가 시집 '유형지로부터의 엽서'에 나온 故 이어령 교수의 서문을 가리키며 그를 회상하고 있다
주광일 변호사가 시집 '유형지로부터의 엽서'에 나온 故 이어령 교수의 서문을 가리키며 그를 회상하고 있다

주 변호사는 인터뷰 내내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1992년 첫 시집 '저녁노을 속의 종소리' 출간 이후, 29년 만인 2021년 제2시집 '유형지로부터의 엽서'를 출간했다. 지난해에는 제3시집 '당신과 세월'을, 올해는 제2시집의 일본어 번역판을 출간했다. 미발표 작품을 포함하면 현재까지 1000편이 넘는 시를 썼다. 다작을 한 셈이다. 또 그의 시에는 유독 '그대'와 '님'이 자주 등장한다. 그 의미가 궁금해 물었다.

"제 시에 나오는 '그대'는 고정된 대상이 아닙니다. 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린 날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 이루지 못한 사랑과 아버지, 때로는 아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주 변호사는 시적 변용(變用)을 최소화 한다. 시인이나 평론가만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표현은 되도록 쓰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쓴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시작(詩作)에서 '독자들과의 교감'을 가장 유념한다고 말했다. 시를 발표할 때 아예 시작노트를 첨부해 독자들에게 의도를 상세히 전달하기도 한다.

"시는 독자들이 읽고 그 느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은유나 비유적 표현이 지나쳐서 문법 파괴적인 표현을 쓰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시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의미가 없습니다. 시는 독자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저는 누구나 시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쓰고 있습니다. 가령, '아버지'라는 시의 마지막 문단에 '봄꽃들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보다 더 나이 먹은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이걸 읽는 순간 누구든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는 문학의 최고봉이다. 성숙한 마음과 직관력 없이는 쓰기 어렵다. 1943년 생으로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주 변호사는 자신의 삶 자체가 시쓰기의 토대가 된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인천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급하게 오고 가며 '난리가 났다'고 외치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충북 음성 출신이었는데, 함께 고향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제 손을 잡고 기차를 탔습니다. 수원역에 도착하자 이미 다 철시(撤市)를 해서 문을 연 상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할머니 한 분만 행상을 펴고 오이를 팔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오이로 끼니를 때우며 허기를 달랜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남은 자식 둘을 데리고 음성군 원남면 조천리로 피신했는데, 워낙 깊은 시골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을 어린 나이에 느꼈던 계기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0년에는 4.19 혁명이 발생했다. "당시 같은 학년 친구가 총을 맞아서 죽었는데, 그로부터 나는 63년을 더 산 셈"이라고 회상했다. 사법시험 합격 후 육군 군법무관(1967~1970년)으로 일할 당시 백마부대 중위로 월남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20대 시절까지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를 체감했다. 그 덕에 한평생 감사하는 마음과 자유의 소중함을 새기게 됐다고 한다. 대표작인 '병든 자유에게'도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유형지'로 비유하고, 광장에서 '자유'를 외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과 괴로움에 대해 쓰면서 당시 시대상을 그립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유형지로부터의 엽서'를 연작으로 80편을 쓰면서, 저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순교자의 정신으로 시를 썼습니다. 대표작은 '병든 자유에게'로 이 시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유를 노래할 자유'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처절한 현실을 살아가는 제 자신을 성찰한 셈이기도 합니다."

주 변호사는 22살 서울법대 졸업 직후 시행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7년 간 검사로 봉직한 법조인이다. 1997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제4대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전관예우'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일부러 대형로펌에 들어가지 않고 2001년부터 지금까지 작은 사무실에서 생활해 왔다. 

그는 전관예우에 대해 "국민 기대를 저버린 행위이며, (고위 공직자 스스로) 자제의 미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고위직 법조인들을 볼때마다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주 변호사는 후배 법조인들에게 겸손과 청렴을 강조하며 "자리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제가 법조인으로서 삶을 잘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늘 고민이 많습니다. 하지만 친한 후배들을 만나면 언제나 자리를 애써 쫒지 말라고 말합니다. 법조인은 바르고, 지식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왕성민 편집위원, 임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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