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현 변호사
한주현 변호사

점심시간임에도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버티지 못하고 수화기를 들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내가 맡은 피해자 국선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였다. 그는 딸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변호사가 맞는지’를 대뜸 물어왔다. 확인해보니 그 사건은 선정서에 피해자 연락처가 잘못 기재된 데다가 검찰에서도 정확한 연락처 확인이 안 된다 해서 피해자 연락을 기다리던 사건이었다.

이후 피해자 본인과 통화했는데, 정작 그는 나의 조력이 딱히 필요하지 않다며 엄마를 대신해 사과하겠다 했다. 좀 궁금해져서 물었다. “국선 변호사 요청은 왜 한 건가요?” 돌아온 대답은 경찰이 묻길래 선정해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서였다는 말이었다. 나는 길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휴지는 꼭 챙긴다. 휴지는 언젠간 쓰이니 받아놔서 나쁠 것 없지 않은가. 그의 답변을 들으며 내가 꼭 그런 휴지가 된 것만 같았다.

나의 경우 위 사건처럼 변호사 조력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아 선정 이후 인사만 나누고 끝난 사건이 전체의 약 3~40%는 되었다. 그런 사건들일지라도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피해자 연락처가 잘못 기재돼 연락이 닿지 못해도 어느 날 갑자기 언성 높은 항의를 들을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는 사실 부족할 수도 있다.

피해자 국선 제도 이용자에게 일정 수수료를 납부하게 하는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소액일지라도 말이다. 비용 안내 앞에서 누구나 국선 변호사의 필요성을 다시 고민하게 될 것이고 이는 변호사 조력이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서비스가 효율적으로 제공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현재로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국선 변호사를 선정해두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 때문에 수사기관과 변호사 모두 얼마나 많은 행정력과 시간을 써왔던가.

나는 이제 피해자 국선 업무를 하지 않는다. 보람을 느낀 적도 있으나 나의 에너지가 나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자꾸만 쓰인다는 자괴감을 지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도 변화 없이는 피해자 국선 변호사들의 이러한 자괴감은 계속될 것이다.

/한주현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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