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재 변호사
김광재 변호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을 대하거나, “행복하세요”라는 덕담을 주고받곤 한다. 대개는 이러한 질문과 덕담에 대해 적당히 얼버무리는 답변을 하는 것 같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 또는 ‘복된 좋은 운수’인데,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 조건이나 때와 장소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질 수 있으며, 행복을 느끼는 정신적 상태는 생활환경이나 생활조건, 인생관,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즉, 행복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만족스럽게 ‘행복’의 개념을 획정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과 관련된 서두의 질문과 덕담에 대해 명확히 답변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이 정신생활영역으로 비슷한 성격을 지닌 ‘양심’과 관련해서는 “양심의 자유”(제19조)로, ‘예술’과 관련해서도 “예술의 자유”(제22조)로 각 규정하고, 다른 권리에 대해서도 선거권(제24조), 청원할 권리(제26조), 재판을 받을 권리(제27조)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행복’과 관련해서는 ‘행복할 권리(행복권)’나 ‘행복의 자유’가 아닌 ‘행복을 추구할 권리(행복추구권)’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기나 상황에 따라 원하는 것들이 있고, 그중에서도 절실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없이 행복하리라 믿는다. 고등학생은 목표하는 대학에 붙기만 한다면 더없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취업준비생은 취업에 성공만 한다면 인생이 바뀌고 행복할 것이라 기대한다. 물론 대학에 붙고 취업에 성공한다면 한동안은 꿈길을 걷는 것처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또 다른 당면 문제를 마주하면서 다시 힘들고 괴로워진다. 내 집 장만이 꿈이었던 사람들이 집을 마련한 후 그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는가?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이나 성취한 것에서 느끼는 행복에 금방 익숙해진다. 항상 지금보다 조금 더 좋은 상황을 갈망하며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더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때로는 객관적으로 좋아졌음에도 오히려 이전 상황보다 더 불행하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객관적으로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렇게 행복은 항구성, 지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모, 가족,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마저도 계속해서 가져다주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헌법이 행복할 권리, 행복의 자유가 아닌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행복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주어진 것도 아니므로 스스로 끊임없이 ‘추구’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헌법은 국가에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제10조 제2문).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행복’의 기준은 개인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국가가 각 개인의 ‘행복권’을 확인하고 보장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가 확인하고 보장해야 하는 대상은, 각 개인의 ‘행복권’ 그 자체일 수는 없고 각자의 주관에 따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행복추구권의 모태(母胎)인 1776년 미국의 버지니아 권리장전과 미국독립선언서에서 이른바 미국건국의 아버지들이 이 권리를 ‘Pursuing Happiness’ ‘The Pursuit of Happiness’로 규정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최소한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 각자 행복을 느끼는 대상이 다르므로 행복추구의 대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직업과 관련하여 계속 행복을 느낀다면 더없이 좋지만, 현실은 직업수행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여가 활동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행복의 추구와 적절한 여가 활동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어떤 여가 활동이 나의 행복추구를 위해 이로운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행복추구의 일환일 수 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여가 활동 대상을 선정할 때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더 좋지만, 최소한 건강을 해치는 것은 안 된다. 술, 담배가 아무리 위안을 주고 행복감을 주더라도 그 순간일 뿐 결국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 둘째, 돈이나 시간이 너무 많이 들면 곤란하다.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활동은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시를 읽거나 쓰는 데서, 그리고 단전호흡과 명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시를 읽거나 쓰는 일, 단전호흡과 명상은 돈과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도움이 되므로 계속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이처럼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고, 행복추구의 핵심은 ‘지속성’에 있다. 꾸준히 한가지의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평온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기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당신은 행복한가요?” 대신 “당신은 행복을 잘 추구하나요?”라고 질문하거나, “행복하세요” 대신 “행복을 잘 추구하세요”라고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어떨까.

/김광재 변호사
법무법인 세종
대한변협 학술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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