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근 변호사
손용근 변호사

‘검수완박’은 법률가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상당 기간 우리 사회의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그런데 ‘완박’의 완전박탈이 말 그대로 검찰수사권의 완전박탈인가? 검수 ‘상박’ 즉 상대적 박탈이지 않은가? 논란은 많았고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그와 관련하여 검수완박법의 유효를 선언하였다. 재판관의 의견은 5(합헌):4(위헌)로 갈렸다. 비슷한 경우에 4:5로 의견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은 헌법재판소 해당 결정의 논거에 대한 찬반이나 비평보다는 그 5:4에 비추어 필자가 갖는 제3의 소견을 쓰고자 한다. 전번의 글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것부터 쓰겠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권을 가지고 있다. 수사권은 수사기관이 행사하여야 한다. 검찰권은 검찰에 있고 경찰권은 경찰에 있다. 이쯤 되면 모두가 다 아는 상식을 왜 또 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답을 하자면 이렇다. 권력이나 권한은 본질적으로 상대를 배제하거나 제압하는 배타성과 지배성을 그 기본속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환기시키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서로 다른 권력은 본질적으로 충돌하고 다툰다. 서로 다른 권한끼리도 다투기 일쑤이다. 다만 그 형식과 방법이 법률적으로 달라지고 문화적으로 진화해 왔다. 논란이 많았던 검수완박법의 바탕에는 이런 배타성과 지배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그 배타와 지배 관념의 정도나 내용이 검수완박을 둘러싸고 매우 적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검찰권이나 경찰권에 대한 확증편향에 가까운 신념논리에 따라 절대배제와 완전지배의 논리가 횡횡하였다. 그 문제에 관하여 조화와 공존을 초월하는 적대적 논쟁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도 많다. 확실하게 진보와 보수의 가치에 일방적으로 충성하는 편향성이 두드러진 논쟁도 많았다. 검찰권과 경찰권이 정치적 이해와 기관적 이해에 따라 분석되고 있는 글들도 상당하다. 드디어는 권한쟁의의 심판이 제기되었고 그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선고되었다. 헌법재판소 2023. 3. 23. 선고 2022헌라2 결정이 그것이다. 그 결정이 선고되자 이를 결정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심판청구 자체를 문제 삼는 비판을 넘어선 힐난의 분위기도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거대야당과 지지층들이 여당 및 그 지지층들과 극명하게 대조적인 의견을 표출하였다. 신중함이 요구되는 대검찰청과 법무부 장관까지 기관적 입장에 기초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진영논리에 맞는 결정내용만을 취사하여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더니 마침내는 재판관의 정치 성향까지 거론하는 것도 목도하였다. 헌법수호자의 역할이 의심스럽다면서 「헌재는 왜 있는가」라는 글이라든지 「‘검수완박 시즌2’를 외치는 속내」 등의 글을 편향의 냄새를 느끼면서 읽고 해석해 보았다.

오늘 필자는 배타성, 지배성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다시 강조해 둔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진영논리적 측면에서 비판하고 필자가 갖는 사적 견해를 피력하기 위한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5:4에 대한 어떤 소견을 제3지대에 선 입장에서 피력해 보려는 것이다. 여기쯤에서 5:4 사건으로 헌법재판 역사에 길이 기록된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있었던 그레고리 존슨(Gregory Johnson) 사건을 끌어와 설명하면 좋을 듯하다. 그 사건의 5:4 위헌판단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건에 관하여 좀 더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84년 텍사스주 댈러스에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를 반대하는 가두시위에서 그레고리 존슨은 “미국에 침을 뱉는다”는 구호를 외치며 성조기에 불을 붙였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존슨은 국가 상징물에 대한 모독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주법에 따라 기소되었고, 주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존슨은 항소하였고, 항소법원은 “국기를 불태운 행위 역시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에 의하여 보호된다”며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반발한 텍사스주 당국이 상고하였다. 연방대법원의 판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격론이 있었지만, 연방대법원은 결국 5대 4로 존슨의 손을 들어줬다.

5명의 대법관들은 「그 사건에 있어서 성조기 소각 행위」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합헌적 행위로 보았다. 이들을 대표해 다수의견을 작성한 윌리엄 브레넌(William Brennan) 대법관은 “단지 사회적으로 어떤 사상이 불쾌하거나 무례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이유로 국가가 그런 사상의 표현을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이 수정헌법 제1조가 규정하고 있는 기본 정신”이라는 헌법해석 아래 국기와 관련된 경우라고 해서 예외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특정 집단이 그들의 정치적 기호에 따라 상징물을 선택한 후 그 결정 사항을 시민들에게 강요한다면 이런 행위야말로 수정헌법 제1조가 금지하는 행위”라고 역설하였다. 그가 그 판결문에 쓴 마지막 문장, “성조기 모독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그 소중한 성조기가 상징하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이다”는 표현은 지금도 명문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판결은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 의회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발끈해 상하 양원 모두 판결에 대한 비난결의안을 채택했고, 성조기 훼손을 처벌하는 성조기보호법을 만들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은 이 법률에도 똑같은 논리로 위헌 판결을 내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헌법이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태극기 소각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어찌 되었을까? 그것을 처벌하지 않으면 제정신이냐고 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헌법이 정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헌법 제21조)에 비추어 모든 소각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견해가 존재하는 헌법 국가·법치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정도의 법률문화는 성숙된 나라라고 자부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4의 의견 나뉨 자체가 증오적 개념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권력과 권한의 분배를 통하여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있는 헌법 국가·법치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법치주의나 법률의 지배를 설명하는 많은 것들도 그러한 의견의 대립과 논쟁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 않는가? 이 점에서 우리 사회는 그 본질을 기본적으로 이해하면서 그 본질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좀 더 성숙하여야 한다. 진영과 진영의 독선과 아집, 비난과 투쟁의 정도가 균형과 조화, 상대방 포용의 상대성을 압도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아쉽다. 헌법재판의 최선두 국가 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는 우리 헌법재판소의 5:4의 의견나뉨을 건강의 징표로서 오히려 옹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입장에서 굳이 미국의 판례 하나를 끌어와서 필자의 속내를 적는 것이다.

검수완박법에 관하여 헌법재판소는 분명히 위법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진보의 진영은 이 점에 집중하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위법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회의 몫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보수의 진영에서는 이점을 이해하고 동의하면 좋을 것이다. 더구나 3:6이 되어야 위헌선언이 가능한 일이라면, 4:5로 위헌의견이 다수가 되더라도 위헌 선언은 불가능하게 되는 제도적 현실과 그런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다.

끝부분에 의견 나뉨과 관련하여 2개의 사건을 더 언급하려 한다. 수년 전 13:0으로 결론 난 형사사건에서 성공보수 약정이 반사회적 행위라는 우리나라 대법원의 그 판결(대법원 2015. 7. 23. 선고 2015다200111 판결), 만장일치였다. 이해관계자나 관계기관의 공론적 논쟁 한번 없었다. 헌법적인가? 법치주의적인가? 투표만 하면 100%에 가까운 찬성이 나오는 어떤 후진국가에서나 일어날 일은 아니었던가? 통합진보당해산청구 사건(헌재 2014. 12. 19. 선고 2013헌다1 결정) 때 헌법재판소의 의견도 9:0일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런데 8:1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1을 이해는 하나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1로 인하여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존재 이유가 세계의 헌법재판 역사에 기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5:4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당연하다. 진영과 편향의 확증논리를 포용과 상대성의 논리로 바꿀 수 있는 기술적 숫자가 5:4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5:4의 검수완박의 헌재 결정을 여야 협치와 공동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법을 다루는 모든 사람들이 먼저 5:4와 4:5의 법률적, 사회적 기능을 보다 깊이 인식하였으면 한다. 반대의견은 타도나 증오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의 대상이므로 이해의 방법과 공존의 형태가 보다 중요하다고 깨달아야 한다. 법률가부터 재고, 삼고 하자! 양극단이 아닌 중간지대를 우리 사회 전체에서 확장시키는 것이 헌법주의자·법치주의자들의 작금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에 법률가로 오래 살아온 나부터 재고, 삼고 하겠다.

/손용근 변호사
前 사법연수원장·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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