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은 변호사
국고은 변호사

변호사 3년 차에 국회로 옮겨 국회 생활 3년 차. 국회에서 상임위 전체 회의보다 자주 겪은 것은 누군가를 보내는 일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가 이곳을 떠나고 그만큼 새로이 이곳에 도착한다.

지난달 우리 방 5명의 직원 중 2명을 보냈다. 여당이 되었고, 곧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사람이 바뀌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란다. 그리도 많은 사람을 보냈는데도 누군가를 보내는 일은 어째 익숙해지질 않는다. 놀란 것은 아닌데, 이 아사리판을 떠난다니 축하해 줄 일인데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독해하니 부정의 감정들밖에 읽히질 않는다. “그만두게 되었어요” 라는 말에 눈도 맞추지 못하며 “축하해요” 라고 답할 뿐.

많은 이들이 의미를, 포부를, 무언가 할 수 있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국회에 도착한다. 필자 역시 그랬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자신을 소모해 겨우 마친 오늘의 일이 내일 하게 될 그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시지프 신화처럼.

카뮈는 「시지프신화」 에서 헛된 희망을 품고 돌을 정상까지 올려 반대쪽으로 추락하는 돌을 바라보는 시지프에서 부조리를 알린다. 책에서 카뮈는 부조리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자살’의 효용을 추론하며 글을 전개한다.

인생은 비극이다. 긍정 회로를 최대한으로 돌려 돌을 정상까지 올렸건만 바로 다음에 펼쳐지는 장면은 그 돌의 추락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이다. 국회를 떠나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돌의 추락을 경험했을 것이다. 절망을 더한 비극은 무기력의 에너지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자살이라 볼 수 있는 퇴사로 귀결되곤 한다.

그럼에도 카뮈는 인생의 비극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며 의미 있는 행동이라 말한다. 인간은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카뮈는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무의미함이 인간에게 자유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설명한다.

비서관님, 오늘도 어제 막 떨어진 그 돌을 또다시 굴려야겠지만, 제가 곁에 있겠다. 다만 돌을 올리는 시간은 지난번과는 분명 다를 테고 돌이 이곳에 다시 굴러떨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같이 해보자. 그네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또 근시일에 누군가를 보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은 나일 것이다. 우리는 돌을 굴리고 떨어지는 돌을 마주하겠지만 그래도 또 돌을 굴릴 것이다. 이는 형벌이 아닌 인생이고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했으니 그 말을 믿어보려 한다.

처음 국회에서 만난 날 내게 이곳을 떠나라 했으면서도 고은의 시지프는 무슨 의미일까, 물으며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지난 인연에게 나의 첫 글을 남긴다.

/국고은 변호사
국회의원실 선임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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