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형 대한변협 재무이사 인터뷰

고집스러운 '반골' 소년... 선생님이 건넨 헌법 책이 진로 바꿔

대학시절 밴드부 활동... 아르바이트 병행하며 사법시험 준비

회생·파산 전문 로펌 설립... 세심한 업무처리로 큰 신뢰 얻어

전문변호사회 활동이 집행부 참여로... "회비 허투로 안 쓸 것"

"매출·영업 실적과 연동된 회비 부담이 실질적 평등에 더 부합"

"한자가 많아 좀 그렇기는 한데... 너한테는 법서(法書)가 맞겠다" 

코흘리개 중학생에게 건넨 선생님의 낡은 헌법 교과서는 이후 삶의 이정표가 됐다. 
경북 군위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박시형(사법시험 51회) 변호사는 어린 시절부터 고집이 남달리 세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벌을 받아 손을 들고 있었던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벌을 준 후에 바로 출타하셨는데, 돌아오실 때까지 1시간이 넘도록 팔을 내리지 않고 꼿꼿하게 벌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항거의 뜻으로 고집스럽게 벌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반골(反骨) 성향 때문에 박 변호사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행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종종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런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반항아' 기질을 잘 알고 있던 박 변호사는 어렴풋하게나마 "법조인 같은 전문직을 해야 사람구실하고 살겠다"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자, 이처럼 성글기만 한 고민을 선생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이 웃으며 헌법 책을 선물했다. 선생님도 법대를 나오셨다고 했다. 

"당시 제가 받은 책은 지금은 작고하신 故권영성 교수님의 '헌법학원론'이었습니다. 손때묻은 교과서로, 한때 청운(靑雲)을 꿈꾸던 선생님의 젊음과 고민이 알알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책이 법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어요. 이후 보물 1호로 소중하게 간직했는데, 대학시절 이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대학시절 기타를 치고 있는 박시형 변호사의 모습 
대학시절 기타를 치고 있는 박시형 변호사의 모습 

고등학교 때는 포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학교를 마쳤다. 이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박 변호사는 스콜피온스, 메탈리카 등 락(Rock) 음악에 한동안 미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답답했던 청소년기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자유를 만끽했다"고 술회했다. 

"입학 후 밴드 동아리에 가입해서 2학년 때는 회장까지 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일렉트로닉 기타를 배웠는데, 이게 돈 없는 고학생이 즐기는 취미로는 딱 안성맞춤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눈만 뜨면 기타부터 찾아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사법시험 준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3학년 때부터다. 이후 휴학을 하고 고시촌을 찾았다. 1차 시험은 비교적 수월하게 합격했지만 2차에서 연거푸 미끄러졌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를 했는데, 문제를 잘못 읽어 총점 1점 차이로 고배를 마시거나 한과목이 과락을 받는 등 좀처럼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시험장에서도 허리디스크가 터져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진통제를 먹는 게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무작정 참기만 했다. 

"시골 출신답게 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입니다(웃음). 그런데 고시 낙방을 거듭하면서 느꼈던 절망스러운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인지, 지금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2차 시험에 떨어지는 꿈을 꾸곤 합니다"

200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공익법무관으로 법조계 첫 발을 내딛었다. 첫 근무지는 법률구조공단 안산출장소였다. 캐비넷에는 미결 사건이 꽤 많이 쌓여있었는데, 그는 우보만리(牛步萬里)의 자세로 하나씩 해결해 가며 금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해 출장소에서는 무죄 판결이 총 3건이 나왔는데, 모두 박 변호사의 손을 거쳤다. 

공익법무관을 마칠 무렵 3년간 처리한 사건을 취합하니 민사가 1000건, 형사는 300여건이었다. 박 변호사는 "법무관 시절 많은 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실력이 늘었다"며 "그때는 30대 초반이라 힘든 줄도 몰랐는데 전역하고 보니 나만큼 일을 많이 한 동기가 없었다"고 했다. 열정적이고 정성스러운 성품이 돋보인다. 

로펌 생활을 거쳐 개업을 선택한 후에는 현실과 치열하게 부딪혔다. ‘서초동 생활’은 고시생 시절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안 해본 사건이 없었는데, 도산 사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싶었던 박 변호사는 그길로 회생·파산 분야에 집중했다. 

"제가 맡아본 일 중 도산은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업무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영역에 속했습니다. 바닥 아래로 떨어진 사람을 다시 끌어올려 구출한다는 보람도 컸고요. 얼마 전까지만해도 도산은 변호사가 직접 사건을 챙기며 열심히 하는 사무실이 적었습니다. 저는 촌사람답게 시시콜콜한 업무까지 하나하나 챙기며 일을 익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업적 관점에서 보자면 회생·파산은 사건당 보수는 낮지만, 대신 회전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비송업무 특성상 직원이 많이 필요한데, 적극적인 성격에 나름대로의 인사와 행정 철학을 가지고 있어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가고 있습니다."

회생·파산 절차는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최후 수단으로 찾는 절차다. 때문에 사건을 다루다 보면 가슴 아픈 장면을 목도할 때가 많다. 어떤 의뢰인은 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지금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며 고개를 떨구기도 하고, 유서를 써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최근 수행한 사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례를 물었다. 

"한 부부가 동시에 파산을 했는데, 남편은 회생을, 부인을 파산 절차를 밟았습니다. 자영업을 하면서 굴곡을 겪어 이미 한차례 회생을 시도했었던 부부입니다. 부부에게는 자녀가 둘이 있었는데, 이전 회생 과정에서 유체동산압류집행을 당한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빨간 딱지’가 붙은 겁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첫째가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중학생이 되어서 또 압류딱지가 붙는 것을 보자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부부가 동시에 압류집행을 당하는 바람에 배우자 우선매수청구로도 방어할 수 없었다. 남편이 진행한 회생절차에서는 중지명령을 받았지만, 부인은 파산이다보니 중지명령이 흔치 않아 법원 담당자를 납득시키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가까스로 중지명령을 받아 압류집행을 며칠 앞두고 간신히 경매를 중단시켰다. 박 변호사는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너무도 절박한 일이라 결코 가볍게 임할 수가 없다"고 했다.  

박시형 변호사가 전문직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박시형 변호사가 전문직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그를 찾는 의뢰인들이 늘어나자 박 변호사는 2022년 회생·파산을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 선경을 설립했다. '선경'은 그가 좌우명으로 삼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에서 따와 만들었다. 주역 문언전에 나오는 고사로 "선행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뜻이다. 처음 법무법인 명칭을 고안했을 때는 행여 누군가 먼저 이름을 신청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정도로 애정이 깊다.  

"법조계를 포함해서 전문분야의 소비자는 공급자(자격사)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공급자들은 대충 일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누가 보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신독(愼獨)의 자세로 법률가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자는 의미에서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박 변호사는 올 2월 출범한 대한변협 제52대 집행부에 재무이사로 합류했다. 
업무에 도움을 받기 위해 가입하게 된 전문변호사회 활동이 집행부 참여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등기·경매변호사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도산변호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등기나 도산 같이 기존에 변호사들의 관심이 적었던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법령과 제도 등 자연스레 개선이 필요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던지라 전문변호사회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확실히 단체의 힘을 빌리니까 진전이 있는 영역이 있었습니다. 실무를 하면서 느낀 불편에 대해 자주 제도 개선을 건의했는데, 그것이 협회를 통해 법원 등 유관기관에서 반영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이나서 활동했는데, 이런 점을 잘 보아주셨는지 집행부 합류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마침 개인·법인 회생에 주력하며 재무제표와 회계에 밝은 박 변호사에게 재무이사직은 안성맞춤이었다. 재무이사는 협회의 재정이 지출되는 모든 사안을 결재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업은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박 변호사는 사실상 변협에서 하는 거의 모든 과업에 자연스레 연동되어 있다.

"재무이사는 담당 상임이사, 소관 팀과 함께 사전 검토를 하고, 사후 결재를 진행합니다. 전표도 일일이 확인하고요. 협회가 추진하는 일 중에 재무이사 전결사항이 많아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한 주 중 적어도 2일은 회무에 쓰는 것 같아요" 

그는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만큼 불필요한 지출은 막아야 한다"며 "무리 없는 선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발품과 노력을 팔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업 수행에는 비용이 수반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며 “아낄 것은 아끼되, 필요한 일에는 쓴다는 ‘적재적처’의 원칙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변호사는 논란이 된 ‘특별분담금’에 대해서도 확고한 신념을 밝혔다. 변호사 사회 전체의 공리 증진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회비를 차등 적용하는 것이 실질적 평등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해외 선진국과 다른 직역의 경우 실적에 연동해 회비를 받는 사례가 많습니다. 새내기 변호사 등 아직 재정이 탄탄하지 않은 변호사님들은 적게 내고, 매출이 큰 로펌이나 중진 변호사님들은 (회비를) 더 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아울러 무조건 회비를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변호사 권익을 높이고, 수준 높은 입법 제안을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가용 예산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회비를 인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올초에는 벽두부터 경사가 쏟아졌다. 박 변호사는 겸임교수로 출강하는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우수강의상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우수변호사상을 받았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도 표창을 수상했다. 업의 본질에 집중하며 착실하게 씨앗을 뿌린 결과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찾으며 살고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 "욕심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변호사로 살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개업변으로서 한때는 먹먹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자 묵묵히 해왔고, 다행스럽게도 제 길을 찾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시대에, 직업인으로서의 보람과 긍지를 유지하며 가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욕심을 부리기 보다는, 올곧은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다소 느릴지언정 더 단단한 결실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글= 왕성민 편집위원 , 사진= 허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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