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대한변협 등록 해상 전문 변호사
김현 대한변협 등록 해상 전문 변호사

필리핀 국적 피고인 A와 B는 라이베리아 컨테이너선의 선원이었다. 공해상에서 조타수 B는 경계의무를 다하지 않아 전방 어선이 멈춰있는 것으로 오판하고 항해사 A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항해사도 항해 서류를 작성하느라 경계의무를 다하지 않아 선박충돌을 막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선을 들이받아 어선의 피해자 2인을 해상에 추락시킨 후 구조하지 않고 도주해 피해자들을 죽게 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선장이나 승무원이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거나, 도주 후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 피고인들은 유엔해양법협약 “공해에서 발생한 선박충돌이나 항해사고에 관해 선장이나 선원의 형사책임이 발생하는 경우, 관련자에 대한 형사 절차는 선박의 기국이나 관련자의 국적국에서만 제기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우리나라의 재판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부산고법(2015. 12. 16. 선고 2015노384)은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들을 형사처벌하지 않았다. ① 해양법협약은 선박충돌에 대한 형사책임은 가해선박 기국과 선장의 국적국만 물을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선박충돌과 불가분의 관계인 구호의무 위반(도주)에 대한 형사책임만 해양법협약의 적용대상에서 제외하기 어렵다. ② 공해상 선박충돌 후 구호의무 위반으로 해양법협약을 배제하고 형사재판권을 행사한 사례가 없다. ③ 공해상 선박에 대하여 기국주의가 적용되고 예외적으로 해적, 노예수송, 해상테러, 대량 해양오염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연안국의 추적권이 제한적으로 인정된다. 도주죄는 기국주의의 예외로 볼 반인륜적인 범죄가 아니다. ④ 해양법협약을 무리하게 축소 해석해 우리나라의 재판권을 인정함은 세계적 흐름에 반하고 외교분쟁을 야기한다. ⑤ 주한 필리핀 대사관이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컨테이너선이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작은 어선을 충돌해 50대 한국 선원 두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하고 구조조치를 하지 않고 도주해 피해자들을 사망케 한 질이 나쁜 뺑소니 사건이다. 선박도주는 해적, 해상테러, 해양오염보다 더 비난가능성이 높으므로, 법원은 해양법협약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가해자 필리핀 선원들에 대한 우리나라의 형사재판관할권을 인정했어야 했다. 해양법협약이 ‘선박충돌이나 항해에 관련된 사고’의 경우 선적국이나 선장/승무원의 국적국에서만 형사절차를 제기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망사고 후 뺑소니와 같이 고의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은 단순한 ‘항해에 관련된 사고’의 예외로 보아 대한민국에서 형사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육상에서 사람을 치고 도주한 뺑소니 운전에 대해 각별히 무거운 처벌을 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유족이 가해자들로부터 민사 손해배상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고 후 외국으로 도주한 가해자들이 우리 수사기관으로부터 소환되거나 형사재판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민사 손해배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아 억울한 한국인 선원 피해자를 적절하게 보호하지 못한 아쉬운 판결이다.

/김현 대한변협 등록 해상 전문 변호사
법무법인 세창·제49대 대한변호사협회장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