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원 변호사
전용원 변호사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양화대교와 성산대교 사이 대로변에 꽤 큰 정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현재 자리잡은 정자는 1989년에 복원된 것이고, 원래의 정자는 없어진 관계로 지도상 명칭으로는 '망원정터'라고 나옵니다. 망원동 근처에 일이 있어서 갔던 날,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이곳을 들러 보았습니다.

망원정에 대한 소개글에서는, 처음에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이 이 곳에 정자를 지었다가, 나중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정자였다고 합니다. 두 번에 걸쳐 "왕의 형"이 망원정을 소유했다고 하는데, 문득 왕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왕위는 큰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하는데, 형이 멀쩡하게 살아서 경치 좋은 곳에 정자도 가지고 있는데 동생이 어떻게 왕이 되었던 것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종대왕의 왕위 계승은 장남이었던 양녕대군의 기행으로 인하여 태종이 세자를 교체하였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종은 왜 형이 있는데도 왕이 되었던 것일까요? 망원정에 잠시 업무 생각에서 벗어나 경치 구경하러 갔다가 궁금증이 동하여 정자에 앉아서 스마트폰 검색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알고보니 정자의 주인이었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연은 꽤나 복잡하였습니다.

△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망원정 터(望遠亭址)의 전경. 조선 세종 6년(1424)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졌다(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망원정 터(望遠亭址)의 전경. 조선 세종 6년(1424)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졌다(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월산대군은 세조의 맏손자입니다. 월산대군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세조의 큰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을 지위에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적장자 원칙을 따르자면 세자의 큰 아들인 월산대군이 세조의 대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어야 하는데, 왕위는 죽은 세자의 아들이 아닌 동생에 돌아가게 됩니다. 즉, 월산대군의 작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고, 그가 예종입니다. 원칙을 벗어난 선택(손자가 아닌 작은 아들에게 왕위 승계)은 세조의 결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예종이 얼마 못 가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므로 적장자 원칙에 따르면 이번에는 제안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에 맞았으나, 왕위는 엉뚱하게 제안대군이 아닌 예종의 조카이자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에게 돌아갑니다. 예종의 뒤를 이은 조카가 바로 성종입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무엇인가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들에게 물려지는 원칙을 벗어나 동생에게 왕위가 갔다가, 또 다음에는 조카에게 넘어가는 왕의 자리는 도대체 어떤 기준일까 의문이 생겨나게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원칙을 거슬러야 했던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당대의 권력자들과 종친들 사이에 이해 관계에 따른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정도가 합리적인 설명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이익극대화를 위한 합의는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의문을 차단하기 위해서 '사후양자' 제도를 통한 출계와 입적이라는 인위적 조정까지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성종은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사후양자로 입적이 되어 죽은 왕의 아들이 되고,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왕의 아들에서 친척 할아버지의 사후 양자로 출계되어 종친 중 일인이 되는 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두 번이나 왕좌에 가까이 있었지만 앉지 못했던 월산대군은 왕좌 대신 망원정에서 먼 곳의 경치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던 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 봅니다. 그 시절에는 탁 트인 한강의 모습이 시원하게 들어왔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망원정에서 바라보는 한강 풍경은 그래도 서울 시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길고 넓은 조망을 볼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서 강변북로가 시야의 아래쪽을 채우고, 강 건너 편도 영등포에 자리잡은 많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원칙을 벗어나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왕위 계승의 정통성 회복을 위해 동원되기도 했던 사후양자 제도는 1990년 민법 개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던 풍경이나 제도가 시간이 흐르면 너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지금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것들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망원정터에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용원 변호사
법무법인 트리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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