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하 변호사
윤준하 변호사

“난을 친다”라는 표현은 내가 알지 못한 사이 자연스럽게 스민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유난히 난은 ‘그리는’ 게 아니라 ‘치는’ 거라 표현한다. 영문도 모르고 ‘친다’ 라는 움직씨의 말을 그렇다 ‘치고’ 쓰는데... 서리가 치듯, 떡메를 치듯, 체로 치듯, 담장을 둘러치듯, 화투를 치듯…. 그 많은 ‘치다’에 관해서 궁금한 듯 아닌 듯 했던, 수상쩍을 정도로 의미가 많은, ‘난을 친다’의 의미에 대하여 우연히 찾아본 날이 있었다. 단어 사전이 전하는 바로는 ‘난을 친다’는 것의 풀이를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치다”의 의미와 동격으로 새긴다. 즉, 종이 위에 난의 형상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식이 많은 집안같이 빼곡하게 쓰인 열다섯 개의 ‘치다’라는 동음이의어 풀이들 중에서, 난을 친다는 표현은 셋째 예문에 위치해 있었다. 열다섯의 동음이의어 중에서 적당한 뜻을 화살통에서 손 잡히는 대로 화살을 꺼내어 활대에 올려 보듯이, 적당히 저 ‘치다’의 의미를 새겨보고, ‘그런 뜻은 아닐까?’ 라고 스스로를 적당히 속이고 믿었던 편이 나았지 않았나 싶었다. 나의 느낌으로는 난이 무슨 동그라미 세모같이 수이 수이 그려지는 물건은 아닐 텐데. 본뜻인 셋째의 풀이에 가져다 대는 것은 영 멋들어지지 않는 느낌이라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묵란첩(墨蘭帖)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묵란첩(墨蘭帖)

붓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하면서도 곧음을 품은. 마치 유연한 철사 같은 난초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은…. 순백의 여백에 한 맥락으로서의 생명 하나를 불어넣는 여정인 것일까. 그러면서도 붓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빛깔 하나 없이 오로지 선의 표현만으로 난을 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의 수고로움을 상상해 보면, 아마 그의 일은 서리가 치는 듯한 내면의 격정은 누르고 또 눌러내어 가장 마지막 층계에 스며 나오는 유연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 수고로움의 결과로 먹으로 쳐낸 난의 형상은 닫힌 도형이 아닌데, 어느덧 하얀 여백에 그려서 치는 단색의 표현은 토담을 둘러치듯이 바깥 세계에 안의 세계를 적당히 구획하여 보여주는 느낌을 준다. 그 결과로 무작위인 것처럼 보이던 곡선들은 어느새 산들바람에 흔들릴 것처럼 생명력을 얻는다. 아마 손이 붓 대신으로 활대를 잡아 그 난초의 곡선을 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힘으로 현악기를 켰다면, 어떤 중후한 선율을 그려냈을 지도 모르겠다. 난을 치는 이가 그 곡선들로 나눠 그은 지면(紙面)의 내면세계 간의 가름지음은, 이렇듯 어떠한 오감의 진동을 만들어 낸다. 이차원의 곡선은, 만든 이의 의지를 품고 몇 차원 쯤 올라서서 보는 이의 내면에 또렷한 불꽃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완성된 난 그림을 보면 그를 표현하기 위한 손의 궤적이 무엇이었을지 따라 상상해보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난 그림으로 당대 최고의 명성이 있었다고 해서, 그의 난 그림을 ‘석파란(石坡蘭)’이라고 일컫는다. 석파란 시리즈들은 사군자화 중에서도 필두에 서는 명작으로,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그림이라고 한다. 석파(石坡)라 함은 대원군의 호이고, 호라 함은 지금 식으로 치면 아이디 같은 명칭인데, 석파는 풀어보면 ‘돌 언덕’ 이라는 뜻 쯤 된다. ‘돌 언덕이 그려낸 난초’ 로 읽을 수도 있으니 풀이만 보면 꽤 운치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석. 파. 란. 세 글자를 한 단어씩 발음해보면 강건한 파열음과 구르는 활음의 적절한 조화가 운율적으로도 멋들어져서 이 단어는 한번 들으면 제법 잊히기 어려운 명칭 중 하나란 생각을 한다. 그 명칭이며, 그의 삶과 그가 친 난초의 유려한 곡선 간의 미묘한 대비점들을 찾다 보면 절로 흥미가 생긴다. 그 또한 작품으로써 무언가를 담고자 함이 있었을까. 그림을 찬찬히 보면 그가 난을 칠 때의 맥락을 떠올리게 되고, 내가 아는 역사적 정보를 온통 끄집어내서 그의 궤적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나 또한 난을 치듯이 말로써 감싸 안고 쓰다듬고 싶은 날이 있다. 내가 그림에 자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개는 자신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어느 정도 나의 역할로 미뤄질 때가 제법 있다. 어쩌면 시시비비를 가르는 현장에 서야하는 직업적 숙명에 눌려서 나에게는 표현에서 유연함을 그려내는 것이 어느덧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명암과 채색보다는, 난을 치는 듯한 담박한 말의 흐름으로 유연한 곡선 같은 메시지를 건네주고 싶은 날은 적잖이 생긴다. 어릴 적 친구가 내 등판에다가 손가락으로 뜻 모를 곡선을 슥슥 그을 때 느껴졌던 원인 모를 그 편안한 느낌처럼, 긴 설명을 덜어내더라도 편안한 전율이 돌고, 이윽고 온기를 찾는 말이 무엇일지 궁리해볼 때가 있다. 그렇기에 나한테 만약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주어진다면,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따뜻한 바람을, 바라는 바대로 일으키는 재주였으면 한다.

온후한 곡선을 품은 난초화를 보면 나 또한 아직 맺음은 거칠고 삐죽할지언정, 말문의 시작은 유연하고 부드러운 그런 위안을 주는 말들을 저장했다가 이윽고 표현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비록 맞닥뜨리는 현실은 돌무지처럼 황량하더라도,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는 날. 이성적 화법은 놓아두고 괜찮을 거라고 위안하는 날, 누군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 저 난을 치려는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난을 치고자 한다. 먹물을 머금은 붓을 쥔 손이 첫 방향부터 잃고 떨리듯이, 그 몰두의 정수에 이른 곡선을 만들어내는 일이 무척 어렵다손 치더라도. 마침내 세상에 놓은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윽고 어떤 울림이 되길 바라므로.

/윤준하 변호사
법무법인 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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