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변호사
김주영 변호사

우리 민사소송법은 소송비용 패소자 부담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즉 패소한 당사자는 인지대나 송달료와 같이 법원에 수수료로 지출한 비용, 증인여비나 감정료와 같이 입증활동에 들어간 비용은 물론 상대방이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지출한 변호사 보수 중 일정 산식에 따라 산정된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 언뜻 생각하면 소송에서 패소한 당사자가 상대방 변호사 보수를 포함한 소송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공정(公正)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언론사의 허위 기사로 명예가 훼손된 어느 공인(公人)이 기자 2명을 상대로 위자료 1억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이 1천만 원만 배상을 인정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법원은 일반적으로 소송비용의 90%를 원고가 부담하라는 판결을 내리는데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원고는 기자 2명이 지출한 변호사비용 중 각각 48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의 90%를 물어 주어야 한다. 결국 864만 원을 소송비용으로 물어내야 하니 결국 배상액을 받을 것이 거의 없어지는 셈이다. 억울한 마음에 항소와 상고를 했다가 기각을 당하면 2심과 3심에서도 비슷한 금액의 소송비용을 각각 물어내야 하니 오히려 가해자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명예훼손이라는 가해행위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고 다만 배상액이 원고가 마땅하다고 느끼는 수준에 못 미치는 액수로 결정된 것인데 원고는 패소 당사자가 되어 피고가 지출한 변호사비용을 부담하게 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야기되는 것이다.

근거 없는 소송을 당한 피고의 입장에서 볼 때도 현행 제도는 불합리하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이웃이 근거 없는 허위 주장을 펴면서 1천만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하자. 비록 적은 금액을 청구한 경우이지만 강퍅한 이웃과 법정에서 마주치기 싫어 1천만 원의 보수를 지급하고 변호사를 선임했고 지리한 법정 공방 끝에 원고 청구 기각이라는 승소판결을 얻었다고 하자. 이 경우 승소한 피고가 청구할 수 있는 변호사보수는 변호사보수의 비용산입에 관한 규칙에 따라 산정된 100만 원에 불과하다.
이토록 우리의 현행 소송비용부담제도는 패소의 이유나 당사자의 고의·과실을 따지지 않고 판결주문상 패소비율에 따라 기계적으로 비용부담이 결정되도록 하며, 부담할 액수에 있어서도 소송의 복잡성, 소요기간, 당사자가 실제 지출한 변호사비용과 비용증가에 기여한 당사자의 책임 정도를 따지지 않고 소가와 패소비율에 따라 결정되는 금액을 부담하도록 하므로 소송에서 이긴 쪽이나 패소한 쪽이나 억울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현행 민사소송법상 소송비용부담제도는 특히 약자에게 불리하다. 기존 제도의 개선을 목적으로 제기되는 공익소송, 약자 입장에서 증명의 부담이 큰 전문적인 소송의 경우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소송의 경우에도 패소의 이유나 당사자의 고의·과실을 따지지 않고 패소의 결과만으로 비용부담이 결정되는 현행 제도는 경제적 약자들로 하여금 제소나 응소 자체를 꺼리게 하는 반면 대기업이나 국가같이 경제적 강자들은 무리한 제소나 뻔뻔스런 응소를 하면서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도록 무기를 쥐여 주는 효과가 있다.

박호균 변호사가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가 발간하는 ‘공익과 인권’ 제22호(2022)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30년 이상 지속되어 오던 변호사보수 각자부담원칙을 군사정부시절인 1990년에 패소자 부담원칙으로 개정한 이래 현재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변호사비용 각자 부담의 원칙을 채택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를 보듯이 결코 글로벌스탠다드가 아니라고 한다.

더구나 현행 민사소송 등 인지법은 소송목적의 값에 일정비율을 곱한 인지(印紙)를 소장에 붙이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소가가 높아질수록 원고의 부담이 커지기에 피해를 주장하는 경제적 약자에게는 더욱 불공정하다. 대한변협은 2017년 인지대감액을 위한 민사소송 등 인지법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고, 주요 선진국의 경우 소가와 무관하게 일정액으로 하거나 그 상한액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도 인지액 상한을 심급별로 2천만 원으로 설정하자는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헌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이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에 응하는 경우 그 사실만으로 큰 경제적 부담이 가해져서는 아니된다. 따라서 인지대의 상한을 정하는 민사소송 등 인지법의 개정, 변호사보수를 원칙적으로 각자 부담하도록 하는 민사소송법 개정, 부당한 제소나 악의적인 응소가 행해진 경우에는 실제로 지출한 소송비용을 간이한 절차를 통해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의 신설 등 공정한 소송비용부담을 위한 제도 개선이 절실히 요구된다.

/김주영 변호사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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