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근 변호사
손용근 변호사

격(格)이라는 말이 있다. 관련하여 익숙한 연상 단어 몇 개를 들자면, 품격(品格), 인격(人格), 성격(性格), 가격(價格) 등이 떠오른다. 국어사전에는 격에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고 되어 있다. ① 이르다, 다다르다 ② 오다 ③ 바로잡다 ④ 궁구하다 ⑤ 겨루다 ⑥ 법, 법식 ⑦ 자리, 지위 ⑧ 자품, 인품 또는 품격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오늘은 그중 자리나 지위 또는 인품과 품격과 관련하여 몇 마디 쓰고자 한다. 필자 자신이 법조인인 까닭으로 법조의 격에 관하여서는 좀 더 많이 강조할 수도 있겠다. 어떤 면에서는 같이 법조의 직역에 있었던 분들께 불편한 말이 되어 곧이곧대로 쓰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격은 격다울 수밖에 없어 직필(直筆)을 쓰기로 하고 아세(阿世)하지는 않겠다. 선해를 부탁드린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는 격의 혼란 시대, 아니 격의 상실 시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함부로 말한다. 그리고 함부로 행동한다. 각자도생(各者圖生), 즉 각자 알아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 기저에는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는 유아독존(唯我獨存), 내가 최고라는 인식의 기저가 엿보인다. 오불관언(吾不關焉), 내로남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의 잘못에는 일체의 부끄러움이 없고, 남의 잘못은 티끌도 하늘을 덮는다. 예수님께서 「너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은 보느냐」고 꾸짖었는데 이런 설법은 우리 사회에서 전혀 설 땅을 잃은 것 같다. SNS의 글이나 유튜브(YouTube)의 내용들은 그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고 하자. 문제는 그렇지 아니할 것으로 사회적 기대나 신분, 책임적 위치에 있는 분들까지 그러하다는 점이다.

최근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종교의 성직자가 국외 순방 중인 대통령전용기의 추락을 원하는 기도(?) 내지 기원을 하였고, 그에 동조하는 듯한 다른 성직자의 글이 삭제되는 진풍경이 보도를 통하여 알려졌다. 종교의 직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격은 추락 정도가 아니고 완전한 상실이다. 「빈곤의 포르노」라는 단어가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의 입에서 나온 것도 그에 못지 않다. 대통령의 부인이 국외 순방 중에 다른 나라의 심장질환 아동가정을 방문하여 환자 어린이를 안아 주는 사진을 두고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빈곤이라는 말은 그 나라의 경제 형편의 자존심을 뭉개는 언어선택이고,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에 왜 포르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지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다. 그 언어가 갖는 별도의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언어선택의 빈곤과 그 이상의 무례가 느껴진다. 선동성 공격언어를 선택한 결과일지 모르겠으나, 그 단어 자체로 국민의 대표자로서 지녀야 할 격은 상실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슷한 예를 한, 두 개만 더 들어보자. 대통령은 헌법에 따르면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 ‘윤 대통령’이라는 표현 대신에 ‘윤 씨’ 내지 ‘윤’이라고 의도를 담아 표시한 것들이 있다고 들었다. 직접 보기도 하였다. 언론이 그 격을 잃는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이 맘에 들지 아니하더라도 언론은 언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기레기」라는 말이 있다. 「쓰레기 기자」의 준말이라고 한다. 한심스러운 품격의 언어다.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진정한 언론인이라면 깊이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가 비극인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행안부 장관이나, 용산구청장이 그들의 말로 인하여 사과 내지 유감 표명을 하는 것을 보았다. 법적 책임은 차치하더라도 도덕적이든 정치적이든 책임지는 의식이나 자세가 선행되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의 격을 상실」한 것이다.

법조의 격은 어떤가? 법조의 영역이야말로 자기 품격을 지켜야 하는 순수 양심지대여야 한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의 법조경험으로 말하자면, 법조의 격이 고양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어떤 일들로 인하여 갑자기 추락하였다는 지적이 타당할 것 같다. 법원의 고위법관이 사법(司法) 최고책임자와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것, 그리고 그 녹음으로 인하여 최고책임자의 발언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인식되는 언론보도는 「법조의 격을 상실」 시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몰래 녹음을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몰래 녹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격이다. 그리고 사법 최고책임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으로 치부되는 일, 이에 관하여서는 더 적지 않겠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변호사 형사 성공보수약정이 반사회적 행위라는 대법원판결도 격과 관련하여 큰 문제가 있다. 근대 사법이 도입된 이래 100년 이상 그렇게 해왔는데 그 판결대로 과연 지난 100년 이상 변호사들이 반사회적 행위를 해 왔다는 말인지? 더구나 「전원일치」 대법원판결이었다. 의견의 다양성이 생명인 조직에서 단 한 분의 반대도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때 그 의견에 동의한 분들은 임기종료 이후에 변호사로서 형사사건을 선임하는 일은 없어야 그나마 자기의 격이 지켜질 것이다. 그래야 전후 일치된 행동이 되고 양식에 부합하는 일이 될 것이 아닌가? 그 100년 이상의 사회상식을 반사회적 행위로 단번에 규정하는 판결의 예상치 못한 선고, 유아독존과 내로남불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사태였다. 어떤 사법 최고책임자가 「검사의 기록을 던져버리라」는 파격적인 자극언어를 사용했던 기억도 있다. 밤새워 수사하는 검사들의 노고를 한 번쯤이라도 생각하였다면 「던져버려라」는 자극언어를 사용하여 사법과 언어의 격을 공개적, 공중적으로 상실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검찰기록의 문제점을 깊이 성찰하라」는 표현은 불가능하였을까? 그 언어의 후유증을 생각하는 원려는 정말 없었을까? 유아독존 이상의 거만과 독선의 느낌이 「던져버려라」는 언어에는 가득하고도 넘친다. 일국의 사법 최고직에 오른 사람이 행정부의 다른 관직으로 옮기는 것, 그리고 그 후 민간기업의 좋은 자리까지 앉아 있는 것도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사법의 격과 관련하여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법원에 오래 근무한 필자로서는 법조의 격이 훼손되었던 일들이 가장 많이 안타깝다. 필자가 법조에 발을 들여놓을 당시인 1970년대 중반 사법이 누렸던 국민적 인정감이나 신뢰감은 매우 큰 것이었다. 법원과 검찰, 변호사협회가 법조삼륜이라고 불렸고 서로 협조하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그러한 신뢰는 급격히 무너져 갔다. 로스쿨 시대가 되면서 많은 변호사가 배출되었고, 그 여파인지 2020년 이후에는 그런 협조와 이해가 거의 다 무너진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필자의 지난 경험으로는 선배 법조인 가운데 진정한 격의 인물들이 여러분 계셨다. 필자가 부장으로 모셨고 나중에 대법관을 지내신 P변호사님도 그중 한 분이신데 법관이 쓰는 언어와 행동의 품격을 배석판사였던 필자에게 몸으로 가르치셨다. 지금은 귀향하셨다. 검찰 고위직을 역임하신 어떤 분은 노구를 무릅쓰고 밤 농사를 지어 재단을 만드시고, 법치 문화향상에 애쓰시는 모습을 지금도 보여주고 계시지 않은가? 법조인의 격을 몸으로 보이시는 일로 생각된다. 두 분 모두 끝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모습으로 「땅에 귀의」 하셨으니 땅이 격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든다.

글을 맺겠다.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은 자리의 격에 맞게 자기의 격을 지켜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격에 맞게,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의 격에 맞게, 사법은 사법의 격에 맞게, 언론은 언론의 격에 맞게, 우리나라 각 분야가 자기의 격을 지켜 나라의 어수선함이 가라앉기를 바란다. 특히 사법을 포함한 법조의 격이 고양되어 나라에 본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 밤에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티브이 프로를 볼까 한다. 산으로 가서 홀로 사는 그들에게는 묘한 어떤 격의 냄새가 있다. 보고 나면 조금은 어수선한 마음이 회복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안 되면 묵연(墨蓮) 한폭 쳐 보겠다. 어니불염여래성(淤泥不染如來性), 진흙에 살아도 물들지 않는다는 글귀, 묵연에 늘 쓰는 글귀다.

/손용근 변호사
前 사법연수원장·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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