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변호사
박재혁 변호사

금리인상 및 대출 규제는 부동산 시장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치고 있다. 일례로 아파트를 분양받아 새집으로 입주하기 위해 기존에 살던 집을 팔려고 몇 개월 전부터 내놓았는데, 집이 팔리지 않아 잔금을 치를 수 없는 경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입주기간에 맞춰 잔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고율의 지연손해금을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칫 살던 집까지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수분양자는 계약금을 포기해서라도 계약관계에서 벗어나기 원한다. 그렇지만 분양자는 일단 중도금 지급 등으로 당사자 일방이 이행에 착수하였으므로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고 맞서게 된다. 중도금이 일부 지급된 경우, 수분양자는 자신의 대금지급 불능이라는 사정을 들어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고 할 것인가? 이 경우 손해배상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몇 가지 참고가 될 만한 민법 규정과 계약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법 제565조는 매매계약 당시 계약금을 수수한 경우, 이를 해약금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보아 “당사자 간에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한편, 제551조의 규정은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해약금에 의한 해제의 경우 별도의 손해배상청구는 봉쇄되어 있다.

다음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표준약관으로 제공하고 있는 아파트표준공급계약서는 계약 해제에 관하여 “1호. [수분양자가] 중도금을 계속 3회 이상 납부하지 아니하여 14일 이상의 유예기간을 정하여 2회 이상 최고하여도 납부하지 아니한 때, 2호. 잔금을 약정일로부터 3월 이내에 납부하지 아니하였을 때” 매도인은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특기할만한 것은, “[수분양자는] 자신의 사정으로 인한 경우 스스로 본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다만, 중도금을 1회라도 납부한 후에는 [매도인이] 인정하는 경우에 한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참고로, 필자가 수행한 소송의 오피스텔 분양계약서에는 ‘수분양자가 중도금을 2회 이상 연체하거나 잔금을 입점지정기간 만료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납부하지 아니하여 14일 이상의 유예기간을 정하여 최고하여도 납부하지 아니하였을 경우 공급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수분양자가 자신의 사정으로 본 계약을 해제하고자 할 경우, 계약금 반환을 요구할 수 없으며, 중도금을 1회라도 납부한 후에는 공급자가 인정하는 경우 외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민법 제565조가 해제권 행사시기를 당사자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로 제한한 것은 당사자의 일방이 이미 이행에 착수한 때에는 그 당사자는 그에 필요한 비용을 지출하였을 것이고, 또 그 당사자는 계약이 이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만일 이러한 단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계약이 해제된다면 예측하지 못한 손해를 입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대법원 1993. 1. 19. 선고 92다31323 판결). 달리 해석하면, 이행착수 이후라는 사정만으로 언제나 계약해제가 불가능하다고 볼 것은 아니고, 계약해제를 원하는 자는 이행착수 이후에 발생한 손해를 배상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민법 제565조는 별도의 손해배상을 봉쇄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해제권은 민법 제565조의 해제권 행사는 아니다.

아파트 분양계약서는 다수의 고객을 예정하고 표준적인 내용으로 계약사항을 정한 약관에 해당하고,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할 것이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은 불공정한 약관의 무효를 규정하고 있는바, 특히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하여 공정성을 잃은 약관조항은 무효라고 규정하고 있고, 1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 2고객이 예상하기 어려운 조항, 3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계약에 따른 본질적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 등은 공정성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아가 법률에 의한 고객의 해지권의 행사를 제한하는 조항, 법률에 따른 사업자의 해지권 행사요건을 완화하여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줄 우려가 있는 조항, 계약의 해지로 인한 원상회복의무를 상당한 이유 없이 고객에게 과중하게 부담시키는 조항 등은 무효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파트 분양계약에서 수분양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대금지급의무이고, 이는 아파트 공급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표준약관에서 “매도인이 인정하는 경우” 수분양자의 사정을 이유로도 계약을 해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일 수분양자에게 다른 재산이 없고, 그렇다고 중도금 잔금을 지급할 여력도 없는 경우, 공급자는 그러한 이유를 들어 하루빨리 해제권을 행사할 것이다. 반면 수분양자에게 다른 재산이 있는 경우,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연체에 따른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아파트를 다시 분양시장에 내어놓아야 하는 위험(미분양의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공급자가 해제권을 행사하지 않고 연체상황을 고의적으로 작출하는 것은 해제권(불행사)의 남용이자 부당한 손해의 확대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 리스계약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이용자가 리스료를 연체하면 자동차를 반납하고 신차 대비 감가상각을 손해로 물어주면 족하다. 공급자 측에 채무불이행이 없으니 계약해지는 절대 불가하고 당초 계약대로 고액의 연체료를 물어야 한다는 입장은 우리의 건전한 거래관념에 반하고 손해의 공평한 분담을 지도원리로 하는 손해배상이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파트 공급계약의 경우, 수분양자는 자기가 분양받은 집에 단 하루도 잠을 잔 적이 없고, 화장실 한번 사용해보지 못했다. 즉, 계약이 중도에 해제되더라도 민법 제565조가 우려하는 공급자의 불측의 손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공급자는 이를 다시 분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파트 공급에 따른 미분양 위험은 처음부터 공급자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칙 또는 손해부담의 공평이라는 손해배상제도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거래에 참여한 당사자 간에는 손해의 확대를 방지하거나 감경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일반적인 의무가 있다 할 것이므로(불법행위의 경우, 91다45929 판결 참조), 이 때 손해배상의 범위는 계약금 몰취 및 3개월 분 연체이자에 국한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할 것이다.

계약 일방이 이행에 착수하고 공급자 측에 채무불이행 사유가 없는 경우, 수분양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계약을 해제할 수 없고 연체에 따른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은 계약의 구속력에 관한 맹신과 과도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공급자의 손해가 합리적으로 보전된다면, 수분양자는 자신의 사정을 들어서도, 또한 “공급자가 인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재혁 변호사
변호사 박재혁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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