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근 변호사
손용근 변호사

헌법국가, 법치국가, 민주국가인 대한민국 내의 텔레비전에 그대로 방영된 한 장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20대의 북한 청년 두 사람이 경찰특공대에 잡힌 채 몸부림치다가 북한군에 넘겨지는 모습이었다. 눈을 가리고 손이 묶였던 청년 두 사람, 가렸던 안대를 풀자 사태를 직감하고 자해에 가까운 몸부림을 보였고, 절망을 온 몸으로 들어내 보였다. 그 장면은 법률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도 보아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늘 들었던 인민재판의 모습이나 중국 공안에 끌려 나온 탈북자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오버랩 되었다. 송환된 이후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처형되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16명을 살해한 범인이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사법체계와 그 운영실태가 그렇다.

감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양식으로 이야기하자. 한 목숨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지고의 가치를 흉내라도 내야하는 절규로서 외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법률가로서 살아온 수십년이 나를 주춤하게 한다. 하고 싶은, 적고 싶은 말, 많이 남겨두고 여기에서는 휴머니스트 법률가로서 최소한의 의문이라도 적어 두려 한다. 이것은 정치적 보수나 진보의 문제와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 한다는 것도 먼저 밝히고 시작하겠다.

우선, 과연 대한민국이 헌법국가인가 하는 의문을 말하고 싶다. 분단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헌법 제3조에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백히 선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은 단순한 선언규범이 아니고, 구체적인 규범력을 갖는 규범이지 않는가? 현실적으로 북한이나 북한주민을 외국이나 외국인에 준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은 제한적인 예외라고 하여야 한다. 근본규범의 규범위치 확보를 위하여서 그렇다는 뜻이다. 북한주민은 잠재적 국민이라는 어느 분의 발언은 헌법의 규범력에 대한 도전이다. 헌법 현실이 그렇더라도 실무 현장에서 그런 말 하는 것, 신중해야 할 것이다.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국민을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인권의 위험지역으로 추방하는 그 장면에서 헌법 제3조는 무참하게 실종되었다.

다음으로 적법절차의 실종을 말하고 싶다. 그들은 대한민국 현재적 국민이 아니고, 잠재적 국민이라고 하더라도 무작정 눈 가리고 손 묶어서 북한으로 그냥 송환되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다. 어민이고 선상에서 무자비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사람인지도 정확하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적법절차에 따르지 않고 보내져야 하는가? 외국인이 국내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고, 외국인이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국내에서 체포되었다면 범죄인인도에 따른 국제적 절차를 따져야 할 일이지 않는가? 흉악범인이라도 재판을 거쳐 처벌해야 하고, 정당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보장되어 있지 아니 한가? 북한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한 처벌이 국내 법원 판결로 집행된 사례도 있지 아니 한가?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의 예외 규정을 들어 범죄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송환근거 논리는 적법절차의 대원리 앞에서 너무 왜소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선상 살인행위에 대한 증거가 없고 자백만 있어 북한으로 돌려보냈다는 설명에서는 또 다른 법치주의의 훼손이 느껴진다. 흉악범이라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때까지는 무죄로 추정 받아야 한다는 엄연한 원칙을 법률가들은 익히 배웠고 실천해 왔다. 자백 이외 증거를 절차에 따라 수집할 기회가 있었는데 타고 온 목선에 대한 압수수색 등 절차는 생략되었다. 목선에 대해 소독을 하고 보냈다니 증거인멸이라는 과도한 생각까지 든다. 공범 1명이 북한에서 체포되었다니 형사사법공조라도 시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모든 절차가 누락 또는 생략 되었다. 법치주의는 찾아볼 수 없고 적법절차는 실종되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라는 당연한 권리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말의 사치에 불과하겠다.

안대가 벗겨지는 순간 몸을 뒤로 빼는 두 사람의 절망적 몸부림은 생존 본능의 즉시적 발현으로 생각된다. 절체절명의 시간이라고 즉감한 순간의 두 사람 행동이야 말로 『진정한 몸짓』이고, 당국의 송환 논거인 대한민국으로의 『귀순의 진정성』과는 면을 달리하는 진실한 진정성의 웅변적 표현일 것이다.

텔레비전 방영 이후 여러 법률가들의 지적과 항의가 있었다. 송환에 관여한 당국자들에 대한 고발까지 어느 변호사 단체에서 제기한 것으로 안다. 인간의 권리 중 가장 중요한 생명권의 문제이고, 법률가들의 금과옥조인 헌법과 적법절차, 법치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문제가 매우 중대하다. 대한변협 등 인권과 관련 있는 단체가 고발 이후의 진행절차에 구체적으로 관심 두어 주기를 적극 요청 드린다.

끝에 하고 싶은 말, 하나 더 적겠다. 이러한 송환 사태가 인권변호사로 대부분의 일생을 살아온 분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때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대단한 아이러니다. 더구나 그 분은 무려 11명이나 살해한 것이 명백한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인이었지 않았었나? 그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들(조선족 동포를 지칭)에 대해 은연 중에 멸시나 깔보는 심리가 있다. 페스카마호 사건의 가해자들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위 송환 사태에서는 정반대의 태도가 느껴진다. 왜 그랬을까? 남북관계의 정치문제가 인권과 법치주의를 초월하는 『사법의 정치화』, 그 정치적 거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 연속이라고나 할까? 그와 비슷한 사법과 관련된 작금의 정치 넘나들기도 걱정스럽다. 여당의 대표가 법원의 가처분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정해지는 정치현상, 다수당인 야당의 대표가 기소사건에 공범으로 적시된 일 등 작금의 현실은 『정치의 사법화』로 『사법의 정치화』를 이끌어 내고 말지 않을까? 걱정스럽고 인권과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지적해 둔다. 사법이 어렵고 정치가 혼란스러운데 『인권과 법치주의』라는 명제, 다시 적는 뜻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곤란 극복의 마지막 현실적 도구가 결국은 『헌법과 법치주의』라는 것을 확실하게 강조하려 한다. 또 이런 글 쓰는 깊은 속내가 오래 전에 배웠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염치가 사라진 내로남불의 정치, 품위가 사라진 인기 영합의 법치주의를 걱정하는 나이든 변호사의 충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독자들께서 깊이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

 

/손용근 변호사

前 사법연수원장·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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