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훈 변호사
안성훈 변호사

현행법령의 수는 5220여 개에 이른다. 법은 최소한의 윤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증가세도 가파르다. 5년 사이에 800여 개의 법령이 늘어났는데, 이는 40년간 2200여 개 증가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다. 이런 상황에서 법을 안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법을 알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 법의 무지가 형법 제16조에서 정한 법률의 착오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 학설의 다수설과 판례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다수설은 법의 무지를 법률의 착오에 포함하는 반면 판례는 법의 무지를 법률의 착오로 인정하지 않는다. ‘법의 무지는 용서받지 못한다(Ignorantia juris non excusat)’. 판례의 이런 태도는 경제학에서 합리적 인간을 기본적 인간상으로 설정했던 것과 비슷해 보인다. 법의 엄정한 적용을 위해서는 ‘법을 아는 인간’을 기본적 인간상으로 설정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지만 합리적 인간 추정처럼 ‘법을 아는 인간’ 추정도 취약한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법의 존재와 그 문언을 알더라도 그 문언의 정당한 해석을 도무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다. 종종 입법자들은 혼란스러운 법을 만들어 놓고는 대놓고 ‘법원 판단을 통해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될 것’이라며 발뺌하기도 한다. 한동안은 각 법원들 사이의 해석도 엇갈릴 것 같은, 그 혼란한 법 문언의 정당한 내용을 미리 ‘알고’ 지키는 일은 요행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때도 있다. 더구나 요새는 그런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렇게 법이 급하게 많아지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복잡해지기만 해서는 아닌 것 같다. 불신이라면 어떤가.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기록해두고 강제력으로 실현하지 않으면 그 금지를 실현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 그러니까 자율적 규범에 있던 것들을 타율적인 법의 자리로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덕적으로 참혹한 일을 직면하고 ‘법이 강해져야 한다’고 탄식하는 것은 양심을 냉소하는 것이다.

법의 물량을 소화하지 못해 ‘법을 알지 못하는 인간’을 법의 무지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잃어가는 것들의 부재에 관해서, 문득 신경이 쓰인다.

 

/안성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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