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현 변호사
배상현 변호사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치던 중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2022년 8월 8일 11시 30분. 점심시간이다. 바쁘게 움직였던 손가락을 멈추고, 양손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문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나를 지켜줄 든든한 우산을 챙겼기 때문이다. 오른손에 우산을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비는 적당히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마치 방금 전까지 열심히 치고 있던 키보드 소리 같았다. 우산을 힘차게 폈다. 빗속을 뚫고 식당으로 향했다. 경보선수보단 느리겠지만 그래도 빠른 발걸음이었다.

식당 안은 이미 나보다 부지런한 손님들로 가득했다. 나는 군중을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고심 끝에 한번에 여러 재료를 먹을 수 있는 철판볶음밥을 골랐다. 비록 혼밥이었지만 스마트폰과 함께여서 심심하지 않았다. 오른손엔 숟가락을, 왼손엔 스마트폰을 들었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 메인창에 ‘서울, 수도권이 호우경보’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큰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식당 입구 쪽으로 갔다. 그런데 식당 밖에서 ‘와아아아아’하는 함성소리가 들렸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에서 나왔다. 아뿔사, 키보드 소리가 나던 귀여운 비는 어디로 가고,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무서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와 관계없을 거라 믿었던 호우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하는 수 없이 우산을 펴고 달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산아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워낙 많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신발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틀렸다.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신발이 아니라 바지가 다 젖었다. 달리면서 빗물은 바지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갔다. 옆을 보니 도로는 강이 되었고, 자동차들은 보트처럼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에는 머리 부분을 빼고 상반신, 하반신 모두 젖었다.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우산이 배신하였다. 누가 보면 옷을 입은 채 샤워를 한 사람 같았다.

폭포같은 비는 퇴근시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퇴근을 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축축하게 젖은 옷과 신발 때문인지 전철 안에서 나오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스펀지 같이 스며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몸을 녹였다. 저녁을 먹고 아들과 정신없이 놀아주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참 운이 없는 날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봤다. 기사를 읽어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일찍 퇴근한 덕에 나는 무사히 귀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늦게 퇴근한 사람들은 도로 위에 고립이 됐다. 도로 위는 침수된 차들로 가득했다. 차를 버리고 퇴근한 사람도 있다. 폭우로 인해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기사 속에는 양복 차림으로 차 위에 올라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서초동 현자’도 있고, 침수된 도로에서 수영하는 ‘관악구 펠프스’도 있었다. 쓰레기로 막힌 배수관을 맨손으로 정리하는 ‘강남역 슈퍼맨’도 있었다. 저들에게 붙여준 이름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학의 민족이 맞는 것 같다.

안타까운 소식도 보였다.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일가족 3명이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 외에도 폭우로 인해 여러 사람이 사망하거나 실종하였다.

스마트폰을 끄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고작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온몸이 젖고, 퇴근길에 추위를 겪은 것만으로 운이 없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돌이켜보면 오늘 있었던 일은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해프닝에 불과했다.

살다보면, 가끔 운이 없다고 생각드는 날이 있지만, 혹시 누군가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 아니었을까.

 

 

/배상현 변호사

OCI 주식회사 법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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