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빈 作 '그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고'

"시적 감각 살린 '변호사만 쓸 수 있는 시'" 평가

우수상에 김진 시인, 가작에 김혜현 변호사 선정

△지난 22일 열린 추모시 선정 회의 모습. 심사위원들이 출품작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지난 22일 열린 추모시 선정 회의 모습. 심사위원들이 출품작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이종엽)는 법률사무소 방화테러 사건 추모시 공모전 대상 수상자로 이은빈 변호사가 출품한 '그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를 선정했다. 우수상에는 김진 시인의 '어찌 놓을 수 있을까', 가작에는 김혜현 변호사의 '어둠은 깊고 빛은 멀리서 오니'가 뽑혔다. <하단 게재>

지난 7월 1일부터 이달 19일까지 진행된 '법률사무소 방화테러 추모시 공모전'에는 변호사와 법률사무소 사무직원, 기자, 일반인 등이 총 37개 시를 출품했다.  

변협은 추모시 선정을 위해 심사TF를 꾸려 평가를 진행했다. TF 위원장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인간의 초상(도화 刊)'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글누림 刊)' 등 다수의 문학 작품을 발표한 유중원(사시 28회) 변호사가 맡았다. 또 1994년 등단 이후 시집 '깍지'와 평론집 '시에 미치다' 등을 발간한 김동원 대구문인협회 이사 등 5명이 심사위원에 위촉됐다.    

TF는 평가의 공정성을 위해 출품자 신상을 철저히 비공개로 한 채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위원들은 "인간의 참된 아픔과 슬픔을 보여주면서 △추모시로서 독립적인 완결성이 있고 △시적 주체가 뚜렷해서 누가 말하는지, 누구에게 말하는지, 또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지를 알 수가 있고 △추모시로서 의미가 충만하면서 시적 언어와 감각을 살린 시를 뽑고자 했다"고 밝혔다.

심사TF는 대상을 수상한 '그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고'에 대해 "변호사가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변호사만이 쓸 수 있는 시'면서도, 이야기 시(詩)로서의 요건도 충족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은빈 변호사
이은빈 변호사

당선자인 이은빈 변호사는 "법률사무소 방화 테러 사건을 처음 뉴스로 접하고 받은 충격이 생생하다" 며 "더욱 절망적이었던 순간은 '오죽 억울했으면 그랬겠냐'며 변호사를 원망하고 살인자를 옹호하는 댓글이 상당수였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모전 참가를 계기로)대학 문학동아리 이후 줄곧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끄적이지도 못했던 시를 쓰면서 덕분에 가슴 속 응어리진 무언가를 시로 풀어낼 때의 정화된 기분을 모처럼 누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마침 공모전 마감일이 업무상 가장 분주한 날과 공교롭게 겹치는 바람에, 그날 저녁 일상을 적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며 "희생된 변호사는 물론 한 팀이 되어 일했을 법률사무소 직원들의 애환을,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싶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우수상으로 뽑힌 김진 시인(한국작가회의)의 시 '어찌 놓을 수 있을까'는 시적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가작으로 뽑힌 김혜현(사시 52회) 변호사의 '어둠은 깊고 빛은 멀리서 오는'은 희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울림을 준다는 평을 받았다.

김 시인은 "남겨진 사람들이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이별앞에 놓였을 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을지를 생각했다"며 "시를 쓰면서 이별의 형태와 아픔보다는, 같이 했던 아름다운 삶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혜현 변호사
김혜현 변호사

김혜현 변호사는 "2022년 6월 9일 오전 11시, 제가 희생자인가 하여 연이어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저는 한동안 번아웃이었다"며 "슬픔에도 색깔이 있어 곧 탈색될 것을 알기에 생생한 슬픔을 생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밝혔다. 

대상 수상작은 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개최되는 '대한변협 창립 70주년 기념식 및 제30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 중 추모행사에서 낭독될 예정이다.

이하 당선작 전문. 


<대상 수상작>이은빈 변호사 作

그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고

샌드위치를 기다리는 줄이 다급하다
금요일 저녁인데 집에들 안가는지
차근차근 기다려 쥐어든 그것
다른 한 손은 마우스에 대고서
화면을 멍하니 응시해본다
벌써 아홉시가 넘었네
그를 위한 마지막 의견서를 지금부터 써야지
사무실에 있을 때나 법원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일할 때나 먹을 때나 잘 때에도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차
판사님 제발 가여운 우리 의뢰인을 도와주세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지만
그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고
두장이 되고
열장이 되고
자정이 되고
새벽이 되고

제발
주말에라도 사건 생각이 나지 않게
뇌를 리셋해주세요
reset 버튼을 누르고 싶은
나의 이름은 변호사

어느덧 기척도 없이
가만가만 다가온 죽음의 숨소리
살려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쳐볼 기회도 없이
뭘 잘못했나요
따져볼 찰나도 없이
새까만 연기로 가득 찬 동굴 속에서
캐비닛 안 빼곡히 꽂힌 법서 틈바구니에서
테이블마다 부지런히 쌓인 기록 사이에서
서면 쓰던 손
수화기를 들고 있던 손
서류철을 매만지던 손
애꿎은 생명들이 하나둘 스러져간다

火魔가 속절없이 삼켜버린
그들의 이름은
나의 이름


<우수상 수상작>김진 시인 作

어찌 놓을 수 있을까

불꽃 속에서
아픈 그리움이
뜨겁게 피어오른다

어느 날
어느 시간
그처럼 소중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다음을 기약하며 삼켰던
수많은 얘기들이
이제야
가슴을 두드리고

미처,
발화되지 못한 약속들은
닫힌 문을 열지 못 하고
당신이 건네 준 마지막 시선만이
곁에 남아 있다

어찌 놓을 수 있을까

아침에 나눈 인사마저
아름다웠던 당신의 미소를
매순간이 찬란했던
함께 흘러 보낸 시간들을

어찌 놓을 수 있을까

시간을 풀어헤쳐
당신을 만나면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어 따뜻했다고
그럼으로 부디,
스치는 작은 인연이라도 맺고 싶다고
전하고 싶다


<가작 수상작>김혜현 변호사 作

어둠은 깊고 빛은 멀리서 오니
― 2022년 법률사무소 방화테러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며

차분한 오전 시간이었습니다
흉포한 불바다가 다가오는데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집과 독단과 이기의 철옹성 같은 분노를
다섯 달 동안 어둠의 아들이 준비해 온 방화를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맹목적 폭거와 무자비의 씨앗이
칠흑 깊은 어둠 속에서
저 혼자 발아하여 팽창해 갔습니다

어둠의 힘으로 자란 불의 환란이
쳐들어온 그날
사라진 통로와
폭발하는 휘발유의 화염 앞에서
일그러진 광기에 맞서며 숨이 막혀갈 때
조금 전에 아침 식사를 함께한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겠지요

님이시여!
얼마나 고통스러웠나요
얼마나 공포스러웠나요

생명은 사람이 가졌으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준 하늘의 것이어서
높이 받들고 다만 무겁게 지킬 일인데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인 양 가볍게 여기는
가치 전도와 대혼란의
이 어두운 시대에
멀리서 오는 빛은 미약하여
우리는 모두
미명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분노와 폭력의 현실은 앞서 가는데
구멍 난 사회 안전망은 찢어져
저 혼자 뒤쳐진 채 펄럭이고 있습니다
모두의 잘못이며 눈먼 시대의 탓입니다

일마다 의뢰인의 입장에서 살피며
억울함이 없는 법의 공정한 이법을 발굴하며
다만 선하고 순하게 살다가
어두운 밤하늘의 별로 떠오른
꽃처럼 맑은 영혼이시여!

못내 애통하고 분통한 기억은
남은 우리가 두고두고 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반듯하고 오롯한 법의 지배가
시대의 어둠을 밀어 내고
찬란하고 향기로운 빛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제 우리 모두가 나서겠습니다

당신들은
어둠이 없는 그곳에서
고이 안식하소서!
짧은 생애 긴 빛으로 영생하소서!

 

/임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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