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득 변호사
배수득 변호사

요즘 세상이 어지럽다. 이제 뉴스를 보는 것은 굉장한 체력이 필요하고 심한 정신적 에너지 소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최근 법률사무소 방화테러사건으로 원통하게 돌아가신 변호사님과 법률 사무 종사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참담하다. 실무에 종사하는 변호사라면 소송관계자로부터 폭언·협박을 안 받아본 분이 드물 것이다. 그래서 이번 법률사무소 방화 참사는 법조인 모두의 일이다. 이 시점에서 법치주의와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권만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공허하다. 이제 변호사는 소송에서 이겨서도 안 되고, 져서도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번 방화는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절대 안 된다. 사법 불신에 바탕을 둔 변호사 역할에 대한 몰이해가 큰 원인이다. 의뢰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를 향한 야만적인 방화 테러 행위로 인해 내가 생각해온 우리 사회 공동체의 길(道)을 잃어버린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도 세상은 혼탁했는지,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사상을 설파하던 분이 계셨다. 공자는 인(仁)의 사상을 실현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충(忠)과 서(恕)를 여러 번 강조하셨는데, 논어 위령공편에는 제자인 자공이 평생토록 실천할 한 가지가 무엇인지(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를 묻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그것은 바로 서(恕)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하지 않는 것(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하셨다. 중용에서는 위 논어의 내용을 더 명확히 하여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공자가 남긴 어록들을 문리적으로만 보면, 충(忠)은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자세를 의미하고, 서(恕)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자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먼저 해주는 자세에 이르면 어떤 세상이 될까. 그렇게 솔선수범하는 사회 분위기가 함께 형성된다면 덜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일견 ‘과연 가능할까’라는 발칙한 상상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나의 사회 공동체를 위한 길은 대구 법률사무소 방화 테러 사건으로 방향을 잃었다. 나는 매일 지도상의 똑같은 서초동 법조타운의 길 위를 쉼 없이 오가는데도, 이제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모든 법조인이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사람이 도를 실천한다면서 사람의 길을 멀리하면 도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공자는 고원한 도리를 탐색했지만, 늘 먼저 일상에서 도리를 찾았다. 군자의 도는 비유하자면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고, 먼 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새카맣게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그 자태와 향기 때문에 그 나무 아래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길이 생긴다고 한다(桃李不言 下自成蹊).

우선은 나부터 가까운 법조인과 함께 우리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다시 길을 찾아야겠다. 내가 맡은 사건들부터 지연된 정의는 없는지, 절차는 준수되고 과정은 정당하였는지, 실질적인 피해나 손해의 회복은 얼마나 되었는지, 실체 법률관계에 맞추어 주장하고 그 권리구제가 이루어졌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겠다. 나아가 사법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기본으로 돌아가 법조 일원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로 취해야 할 조치를 실천해야겠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사법 불신의 장애를 넘어 서로 다른 구성원이 함께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며 상호 존중하는 성숙한 시민사회가 형성되기를 기대해본다.

 

 

/배수득 변호사

법무법인 청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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