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7월 28일 설립... 한국전쟁으로 부산서 출발

변호사 등록심사권·징계권 등 바탕으로 자치 실현

협회장선거 간선제서 직선제로… 출신 지역 다변화

인권침해사건에 진상조사·성명서발표 등 적극 대응

미군정청 법률고문과 국내 법조인 대표들(1946년)
미군정청 법률고문과 국내 법조인 대표들(1946년)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변호사법 제1조 제1항)."

70년 동안 법률가의 사명을 묵묵하게 감당해온 대한변호사협회가 오는 28일 고희(古稀)를 맞는다.

변협은 해방 후인 1949년 11월 7일 변호사법이 제정되면서 설립 근거가 마련됐다. 이듬해 6월 17일 대법원 회의실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됐으나, 일주일 뒤 한국전쟁이 발발해 설립 절차가 미뤄졌다. 이후 1952년 7월 28일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협회 규약을 확정하고, 8월 29일 법무부에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다만 8월 29일은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날이어서 창립기념일은 7월 28일로 정했다.

변호사법의 제정이유서에는 변호사법 입법 취지를 "정부기관의 준법여부를 민간의 립장(입장)에서 감시 또는 보좌하는 변호사제도를 확립하려는 것임"으로 명기하고 있다.     

이후 변협은 공공성과 독립성을 담보한 법률가로서 변호사 직역의 지향점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1962년 변호사윤리장전을 제정하고 1982년 변호사법이 전부개정되면서 변호사 등록 업무가 법무부에서 변협으로 이관돼 본격적인 변호사 자치(自治)시대가 열렸다.

당시 법무부 법무과장으로서 변호사법 개정을 주도했던 송종의(사시1회)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은 "변호사 사회의 자율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변호사의 자질이 높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책임감도 없어지게 되고, 그러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술회했다.<법조신문 2021. 12. 9. 자 "변호사는 중업... 사회에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참조> 덕분에 송 이사장은 검사로서는 이례적으로 1983년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1995년에는 변호사 등록심사제가 도입되고, 대한변협 징계위원회가 변호사 징계권을 갖게 됐다. 이처럼 변협의 역사는 변호사 사회의 자율성 확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 1952년부터 현재까지의 협회장 명단
△ 1952년부터 현재까지의 협회장 명단

협회장 선출 방식도 큰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는 대의원 투표를 통한 간선제로 협회장을 선출했으나 제46대 신영무(사시 9회) 협회장을 마지막으로 협회장 선출 방식이 직선제로 변경됐다. 하지만 간선제는 민주적 절차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고, 전국 변호사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서울변회 소속 회원에게 과도하게 유리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지난 2013년 직선제로 전환됐다.     

첫 직선제 협회장은 위철환(사시 28회) 변호사였으며 이후 현 이종엽 협회장까지 총 5명의 직선제 협회장이 탄생했다. 직선제 이후 서울변회 이외의 지방변회 소속 변호사가 협회장이 된 것은 위철환(경기중앙변회), 이종엽(인천변회) 변호사 2명이다.

한편 변협은 창립 이래로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변호사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마산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변협은 즉각 마산사건 진상조사단(단장 신태악)을 꾸렸다. 조사단은 3일간 출장조사를 마치고 "마산시민의 시위는 정부 측이 주장처럼 용공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뜻으로 일어난 것이며, 경찰의 제지방법이 졸렬하여 무차별 발포를 자행함으로써 인명을 살상한 것이므로 발포경찰을 색출하여 살인죄로 엄단하라"고 요구하였다. 결과를 보고 받은 당시 정구영 협회장(제8대, 제10대협회장 역임)도 "마산사건은 방자한 관권의 극치이자 민권유린의 표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변협은 비상사태대책위원회를 조직했으며, 4월 27일 성명을 발표해 △부정선거 주모자 처벌 △부정선거에 항거해 구속된 자 석방 △시위군중에 발포한 경찰관 색출과 처벌 등을 요구했다.

1953년 12월 10일 최초의 전국변호사대회에서는 6·25 전쟁 처리 시 소홀했던 인권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인권 옹호에 대한 결의를 했다. 이후 1961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부터 인권 옹호 사업은 더욱 활성화 됐다.

1985년부터는 국내 인권현황을 체계적을 분석한 '인권보고서' 발간을 시작했다. 서슬퍼런 군부정권 아래에서 탄압을 무릅쓰고 열악했던 인권상황을 정확히 진단·평가함으로써 인권옹호라는 사명을 완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1986년에는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권인숙 학생에 대한 성고문 사건 조사단을 꾸려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에게 가해자의 구속수사를 요구하고,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꾸려 승소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7인의 특별조사단을 꾸려 사건진상조사를 진행했다.

1987년 4월 13일 발표된 대한변협의 '호헌반대성명서'.
1987년 4월 13일 발표된 대한변협의 '호헌반대성명서'.

국민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1987년 발표된 '호헌 반대 성명서'이다. 제5공화국 정부는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 등의 내용이 담긴 개헌작업을 중단하고 기존 헌법대로 간선제를 통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대한변협은 당일 오후 "개헌 그 자체는 이미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이를 중지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반박 성명을 내 전국적인 호헌철폐 운동을 이끌어냈다. 

이 밖에도 △1966년 사할린동포 귀환 및 법적지위 보장을 위한 운동 △2000년 김옥분피살사건 진상조사 △2001년 대우자동차노동조합원과잉진압사건 진상조사 등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약자와 소수자 인권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매진해왔다.

사할린동포귀환촉진 심포지움에 참가한 대한변협 사할린동포귀환위원회(1984)
사할린동포귀환촉진 심포지움에 참가한 대한변협 사할린동포귀환위원회(1984)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제도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과거에는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피고인이 검사 측의 주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변협은 국선변호인 명부를 법원에 배포한 후, 구치소와 교도소 등에 국선변호인 활용 취지와 절차를 널리 공시함으로써 헌법상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일역(一役)을 담당했다. 

△ 1999년 9월 7일, 제16차 로아시아 서울총회
△ 1999년 9월 7일, 제16차 로아시아 서울총회

세계 법률가들과의 법률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1958년 IBA(국제변호사회) 케룬대회를 시작으로 LAWASIA(로아시아, 아시아 서태평양지역 법률가회의) 등이 주최한 행사에 변협은 한국 법률가 대표로 꾸준히 참여했다.

아직 국제법률행사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70년대부터 변협은 직접 국제대회 주관을 맡기도 했다. 1977년 LAWASIA 총회를 시작으로 1999년, 2011년에 걸쳐 세 차례 LAWASIA 총회를 국내에서 개최했다. 이어 2004년과 2013년에는 IPBA(환태평양변호사회) 총회를, 2019년에는 IBA 총회를, 1991년·2009년·2020년에는 POLA(아시아변호사단체장회의)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다방면에 걸친 노력으로 IBA 아시아본부가 2012년 서울에 입주하였으며, 2013년에는 법무부·서울시·대한상사중재원과 함께 동북아 지역 최초로 중재심리 전문시설인 서울국제중재센터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한편 회원 수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2006년 1만 번째 회원이 등록된 이후, 변호사 수는 2014년 2만 명, 2020년 3만 명을 넘어섰다. 국내 최초 변호사인 홍재기 변호사(1873~1950)가 탄생한 이래 114년 만이다. 늘어난 변호사들은 사회 곳곳에서 풀뿌리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종엽 협회장은 "지난 70년간 대한변호사협회는 시대적 사명 앞에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법치(法治)의 시스템이 이 땅에 정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해왔다"며 "그 뜻을 이어받아 앞으로도 국민이 기대하는 바에 부응할 수 있도록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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