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언어를 잃은 자리에 시계의 심상만이 떠오른다. 태엽에 끌려, 무색한 숫자들을 훑어, 영원할 것처럼 같은 곳에 돌아오다가, 어느덧 멈춰버리는, 그런 시계바늘.

어떻게 보면 변호사는 언어의 전문가다. 글로 적힌 규범들의 의미를 찾아내고 산만한 사실들을 요건사실, 구성요건 등 이름을 붙여 그 규범들의 의미에 갖다 붙일 수 있도록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그 직업의 본령이니 말이다. 뭘 받아 내야 하는 사람이든, 억울한 사람이든, 죄지은 사람이든,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법의 세계에서 법의 언어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법의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말하자면 통역가다. 하지만 삶은 요건사실로 사는 게 아니다 보니, 변호사가 자신이 익숙한 그런 언어의 세계에서만 살아도 충분한 것이 아니어서, 변호사도 종종 언어를 잃어버린다. 수 시간을 앉아 울고 웃고 한탄하고 열변을 토하는, 남의 이야기는 세련되게 정리하고 평가하면서도 정작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어떤 언어도 떠오르지 않을 때. 그리고 그 자리에 마치 영원히 항상 같은 곳에 돌아올 것만 같은 무심한 시계만이 오롯하게 떠오를 때.

탄식하자. 아, 삶이란 것도 거저 영영 돌아올 것만 같더니 어느덧 잃어버리는, 그런 것일까.

언젠가 나의 삶이라는 게 어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의 기억을 더듬어보려 한다. 딱히 내키지 않는 일들이 간절한 꿈으로 둔갑한 것 같아 후회도 해본다.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주 멋진 환상으로 차 있는 것은 아닐까, 물어도 본다. 벚꽃같은 꿈 좇아 시선 올려만 걷다가 흐드러진 민들레를 짓이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며 고개도 숙여보고. 그래, 지금을 충만하게 포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꿈꾼다는 일은 소주 댓병같은 싸구려 마법이다.

입하가 지났지만 아직 봄 같은 여름이다. 봄이라고 치자. 다시 돌아오지 않는 봄이다. 창밖을 보자. 스스로를 위해 언어를 가져볼 시간이다.

/안성훈 변호사

부천시청 감사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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