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인권변호사' 88세로 영면에… 조문객 행렬 이어져

'분지필화' 사건 시작으로 엄혹한 시절에 시국사건 맡아

"불의한 권력 앞에 끌려온 사람들 위해 변호인석 지켜"

검(劍에) 밀리던 붓
그 붓으로 기어이 검 이겨내고자
어둠을 쪼개는 안간힘
제 몸 태워 어둠 밝히는
한 자루 촛불이고자
오늘 새로이 다짐하는 뜨거운 염원
역사의 길섶에 피어나거라.

-한승헌 변호사 시 <역사의 길섶에서> 中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탄압받는 이들을 위해 법조인의 소명을 다했던 산민(山民) 한승헌(고시 8회) 변호사가 향년 88세로 지난 20일 영면에 들었다. 

서울시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 마련된 한 변호사의 빈소는 입구부터 근조화환으로 가득찼다. 정치인과 저명한 법조인, 각종 재단의 이사장 등 각계각층 인사의 이름이 박힌 화환들을 지나쳐 마주한 한 변호사의 빈소는 인권 변호사였음에도 "변호사가 인권을 지키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며 그 호칭을 싫어했던 생전 한 변호사의 성품을 보여주듯 소박했다. 1세대 인권 변호사로서 역사 곳곳에 남겨놓은 그의 발자취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공간이었다.

한 변호사를 추모하기 위해 찾아오는 조문객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21일 문재인 대통령도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문대통령은 "한 변호사님과 인연은 제가 변호사가 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간다"며 "대학 4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서대문 구치소에서 감방을 배정받았던 첫날, 한순간 낯선 세계로 굴러떨어진 캄캄절벽 같았던 그 순간, 옆 감방에서 교도관을 통해 새 내의 한 벌을 보내주신 분이 계셨는데 바로 한 변호사님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으셨지만, 당신은 영원한 변호사였고, 인권 변호사의 상징이었으며, 후배 변호사들의 사표였다"며 "한 변호사님의 영전에 깊은 존경과 조의를 바친다"고 애도했다.

△ 22일 이종엽 대한변협회장이 한승헌 변호사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고 있다.
△ 22일 이종엽 대한변협회장이 한승헌 변호사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고 있다.

22일에는 이종엽 대한변호사협회장도 늦은 시간 빈소를 찾았다. 이 협회장은 "인권옹호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신 대원로께서 명을 달리해서 착잡한 마음"이라며 "후배들이 그 뜻을 잘 이어받아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고인이 편안한 곳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기원한다"고 말했다.

빈소 맞은편에 마련된 접객실도 추모객들로 넘쳐났다. 한 변호사와 활동을 같이 했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변호사들을 비롯해 활동가, 출판계 인사들이 집결했다. 

민변 창립자로서 한 변호사와 오랜 기간 활동을 같이 해온 박용일 변호사는 "한 변호사는 원래 아나운서 혹은 기자 지망생이었는데 그쪽 방면으로 잘 풀리지 않자, 주변에서 누가 고등고시를 하면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해 고시를 보고 법조인이 됐던 케이스라 일반 법조인과는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었다"며 "특히 문인 기질이 있어서 시집이나 문학집 등을 40권 이상씩 내는 등 법조인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탁월한 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던 분"이라며 고인을 떠올렸다.

이어 "일을 할 때는 굉장히 철두철미하고 치밀해서 의뢰인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는데, 사실은 유머와 위트의 달인이었다. '산민객담'이라는 유머집을 3권이나 낼 정도"라고 말했다.

한 장애인권 활동가는 "한 변호사님은 활동을 하러 집회에 나갈 때마다 항상 그 곳에 있었던,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했던 분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빈소에서 간단히 인사만 하고 발걸음을 돌린 한 청년변호사는 "사실 한 변호사님과 생전에 친분이 있었던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저 역시 변호사로서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하셨던 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인사라도 하고 싶어 퇴근길에 잠깐 들리게 됐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의 빈소 밖 공간 한 켠에는 1세대 인권 변호사로서의 그의 생애가 간단히 적힌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라북도 진안 출생인 한 변호사는 제8회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처음에는 검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다 5년 뒤 검사복을 벗고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변호사로 새출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1965년 분지필화 사건 변호를 맡으며 시국사건 변호의 문을 열었다. 

당시 소설가 남정현 씨가 단편소설 '분지(糞地)'를 발표했는데 이후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가 이 소설을 실었다. 그러자 "반미감정을 고취시키고 북괴를 동조시켰다"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한 변호사는 이 재판을 맡아 창작의 자유와 국가의 검열이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선고유예 판결을 했다.

이를 계기로 한 변호사는 △동백림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오적' 필화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주요한 시국사건들을 맡으며 인권 변호사로서의 발자취를 하나둘씩 역사에 새겨 넣었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도 한 변호사의 생애에서 빠질 수 없는 한 페이지였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유신체제 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을 수사하면서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에서 한 변호사는 유신정권의 불합리에 맞서 여정남 씨를 변호했다.

한 변호사는 시국사건을 계속 맡아온 이유에 대해 "내 변론이 판결에 반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의한 권력 앞에 맨 몸으로 묶여서 끌려나온 의로운 한 인간을 외롭지 않게 해주고, 적법절차에 어긋나는 검사의 공격이나 재판 진행을 감시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변호인석을 지켰다"며 "위법 부당한 재판의 현장을 직접 보고, 이를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하기 위해서도 변호인석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시국사건을 변호를 주로 맡으면서 한 변호사도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연행돼 투옥됐고, 이로 인해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기도 했다. 그 동안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등록하고 출판계에 뛰어들어 수많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자 한 변호사는 제17대 감사원장에 발탁돼 소신 행정을 펼쳤다. 이후 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건 변호대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서울특별시 시정고문단 대표 등을 맡으며 동료, 후배 변호사들과 주변 지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 한승헌 변호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초구 가톨릭대 성모병원은 근조화환으로 가득찼다.
△ 한승헌 변호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초구 가톨릭대 성모병원은 근조화환으로 가득찼다.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

한 변호사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던 굳은 다짐이 게시판 문구에 아로 새겨져 있었다. 문상객들은 숙연하게 이 문구를 한 번씩 바라보며 조문을 마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한 변호사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25일까지 치러진다. 

 

/남가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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