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법조적 논리적 양심을 의미하며, 법관 개인의 주관적·종교적·정치적 신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헌법에서 그려지고 있는 법관의 모습은 국민의 권리구제기관으로써 헌법과 법률 이외의 어떠한 지시에도 따르지 않는 독립적이고 양심적인 재판을 하는 심판자이다. 양심이 내포하는 선량한 이미지로 인하여 그 심판자는 중립적이고 사심이 없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판의 수준은 개별 법관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구체적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매년 발표하는 법관평가 자료가 있다. 우수법관의 경우 그 이름을 공표하며 그들의 공적을 칭송하고 있으나 정작 문제 있는 법관의 이름은 공표되지 아니한 채 단지 그가 법정에서 한 언행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재판장의 반말과 호통, 변론의 중도 제지, 일방적인 재판 진행, 불합리한 조정 강권, 영문을 알 수 없는 짜증과 분노의 표출 등 이러한 악습은 매년 반복되면서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률과 윤리, 법률과 종교는 대립되거나 그 존재영역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재판작용에 있어서 법관의 양심이라는 문제는 법관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마태복음 7장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법관은 이 세상에서는 판단자로서 사람을 정죄하는 직분을 행하지만, 결국 그도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의 영혼이 신의 판단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중세의 뿌리 깊은 종교관념을 경시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계몽주의 철학이 등장하기 전 적어도 18세기까지 중세 유럽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처럼 재판작용에 있어서 신적인 권위에 의존한 것은 비단 재판작용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법관의 신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법관은, 만일 무죄한 피고인을 처벌하는 판단을 할 경우, 자신의 영혼이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인 배경은 재판작용에 대한 근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이유로 드물지 않게 영적인 권위를 가진 신학자나 고해신부가 재판작용을 맡도록 요구되었다. 이와 동시에 법관의 도의적 안도감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각종 절차가 고안되었다. 보통법 전통의 배심재판제도, 증인의 증언에 의존하여 사실을 확정하는 것과 같은 제도에 의하여 법관은 오판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배심원이나 증인에게 돌릴 수 있었다(Wim Decock, The Judge’s Conscience and the Protection of the Criminal Defendant).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의 재판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나라의 법관은 그의 재판권을 견제할 아무런 장치가 없다. 재판기록은 당사자와 대리인에게만 열람이 허용된다는 본질적인 제약이 있을 뿐 아니라, 재판의 독립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해 제3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이 터부시되고, 일단 재판이 확정되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우리의 심급제도는 오판을 시정하기 위한 것인데, 1심 재판에 불복하여 항소하더라도 항소심은 매우 경직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항소재판은 1심의 사실관계를 대부분 인용하여 재판할 뿐 아니라, 1심 사실관계를 번복하기 위한 증인소환에 매우 인색하고, 설령 그 증인이 1심 판단과 다른 내용으로 증언하더라도 이에 관한 논리적인 시비판단 없이 막연히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항소인의 주장이 배척되기 일쑤다.

사법통계에 항소기각, 상고기각의 비율이 높은 것은 1심 판단, 항소심 판단이 정당해서 나온 결과라기보다 재판의 경직성에서 (흡사 1심 재판을 쉽게 번복하면 재판의 권위가 실추되고 사법불신 풍조가 만연될 것처럼) 비롯되는 것이다. 요컨대 법관의 독립성은 재판의 공정을 위한 것인데, 실제로는 자의적 재판이라는 폐단을 가져오기 쉽고,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른 판단작용’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오판임이 밝혀지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생각건대 재판의 운명을 법관의 양심에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우리 국민이 재판작용으로 받게 되는 영향이 너무나 크다. 합리성과 공정성이 결여된 경직된 사법은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국가권력으로써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겠지만, 국민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믿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케 하는 악습이 매년 반복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를 문명국가의 사법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재판작용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궁극의 가치일 뿐 아니라, 재판의 공정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계절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재혁 변호사

변호사 박재혁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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