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정치와 미술은 관련 없는 먼 이야기 같다. 하지만 미술은 인간의 ‘현재적 삶’을 반영한다. 정치는 사전적 의미로 “국가주권을 위임받은 자가 그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 또는 “권력의 획득, 유지 및 행사(行使)에 관한 사회집단의 활동”이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현실을 직관’하여 보여주는 미술은 종교성을 띤 서양 중세미술에서조차 봉건영주와 성직자의 지배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전통 미술가들은 ‘권력을 가진 이’에게 봉사하는 작품들을 의뢰받았다. 고용된 직공에 불과했던 미술가들이 창작의 자유를 누린 것은 도시 상공 시민계급이 ‘인권’에 눈뜨기 시작한 르네상스말기 부터였다.

반면, 종교개혁과 민중미술같이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반체제적 미술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예쁜 색과 아름드리 대상을 그린 작품들을 정치와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제도적으로는 민주화가 보장된 시대, 철지난 논의 같은 ‘정치미술’은 이제 다양한 테마와 섬세한 대중들에 의해 과거를 재해석하고 가치를 재조정한다. 탈 근대화, 젠더와 정체성, 타자와 이주, 신자유주의와 생태미술, 전쟁과 난민 등,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공존과 상생’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인터넷의 대중화가 가져온 세대의 격변은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패러다임을 미술의 역할로 치환시킨다.

△Two-headed chicken, Maria Primachenko, 1977 전쟁으로 소실된 우크라이나 작품
△Two-headed chicken, Maria Primachenko, 1977 전쟁으로 소실된 우크라이나 작품

미술이 정치적 희생물이 되는 반달리즘(Vandalism)의 현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속에서도 읽을 수 있다. 3월6일 BBC는 키예프 성 소피아 대성당 등 7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우크라이나를 다룬 영상에서 오데사 미술관을 빙빙 두르며 이어지는 시민들의 행렬을 보도했다. 보도는 이어서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있는 또 다른 미술관의 책임자 올레시아 오스트롭스카-리우타의 인터뷰를 다루면서 “(전쟁은) 영토에 대한 공격뿐 아니라 문화에 대한 공격도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공식 트위터 MFA of Ukraine’ 역시 “러시아의 침략으로 유명 민속화가 마리아 프리마첸코의 작품 25점이 불탔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21세기의 정치미술은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르포하는 현실을 발언해야한다. 이제 정치미술도 ‘논쟁-비판-저항’을 가로지른, 현실적 삶과 인류를 위해 발언하는 민주적 가치에 주목할 때다. 누가 정치를 장악했느냐가 아닌,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현실발언의 세상, 이것이 3월 9일 2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민이 선택한 미래가 아닐까.

△종교가 정치가 된 6세기 미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신하들
△종교가 정치가 된 6세기 미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신하들

/안현정 성균관대박물관 큐레이터

예술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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