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 ‘디스커버리 제도’ 연구반 본격 가동

“항소율 낮아져 분쟁 조기 종결에 큰 도움될 것”

디스커버리 기능 수용한 개정법률안 국회 계류

법원 내에서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될 경우 하급심이 내실 있게 운영돼 사실심 단계에서 당사자들이 재판에 승복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대기업과 정부기관 등 ‘공룡집단’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 개인들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 정보 비대칭과 당사자 불균형 문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소모적 다툼 줄여 충실한 변론 준비 가능”

디스커버리 제도는 미국 등 영미법(common law) 계수 국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증거개시(開示)절차’를 의미한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당사자는 소송 상대방에게 서면 질의를 보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법원을 통해 제3자에 대한 자료 요청도 가능하다. 당사자가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법원은 해당 내용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등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이처럼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증거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소송 쟁점이 명확해 질 뿐만 아니라 증거 자료를 수집·보관하는 기능도 자연스레 이뤄진다.

무엇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개인이 대기업이나 국가 기관을 상대로 소송전을 펼칠 때 큰 힘을 발휘한다. 국내 민사소송에서 입증책임 없는 당사자(주로 피고)는 증거 제출에 매우 소극적이다. 증거가 부족하면 입증책임을 지는 쪽이 패소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증거를 제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동차 결함 등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제조물 책임 소송에서 개인은 기업·기관의 비협조로 과실책임 입증에 곤란을 겪다 패소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제도가 시행돼 각 당사자가 지닌 증거가 모두 현출되면, 개인도 대기업 등 거대 집단과 대등한 입장에서 다퉈볼 여지가 생긴다.

엄자혜(변시 6회) 대한변협 사무차장은 “민사소송 당사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실에 대해 증명책임을 지는 게 원칙인데, 핵심 자료가 정부·기업·의료기관 등에 증거가 집중돼 있는 사례가 많다”며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개인도 증거 수집접근에 용이해지므로 소송 당사자 간 정보 비대칭 문제가 상당히 완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심 충실화로 항소율·상고율 대폭 낮아질 것”

“대법원까지 간다.”

우리나라의 높은 항소율과 상고율은 법조계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로 거론된다.

당사자들이 1심과 2심에서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비율이 높을수록 분쟁이 장기화 돼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는 데다, 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돼 1심에서 증거 조사가 충실히 이뤄지면 법정 분쟁 조기 종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형두(사시 29회) 법원행정처 차장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인 2019년 ‘법학평론’에 기고한 논문(새로운 법조양성체제 하에서 미국식 디스커버리의 도입방안)을 통해 “많은 사건이 1심에서 종결되지 못하고 항소된다는 건 분쟁의 종국적 해결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것”이라며 “항소심을 거치는 사건이 많으면 판사·변호사·법원공무원 등 재판 역량의 투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점점 더 많은 사건을 항소하는 현상의 핵심 원인은 1심에서 증거 조사가 충분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1심에서 증거 조사를 철저히 하도록 재판 제도를 개선하면 악순환 고리를 끊는데 상당히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문에 따르면 지방법원 합의부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1997년 30.8%였지만 2007년에는 40.6%, 2017년에는 40.5%에 달했다. 2021년 사법연감 통계에 의하면 올해 1심 민사합의부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43%수준이다. 사건 당사자 중 절반 이상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심 문턱을 넘고 있는 셈이다.

도입 기대감 ‘솔솔’… 조응천 발의 법안도 ‘눈길’

변호사 업계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추진에 힘을 싣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이종엽)는 지난 3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TF팀’을 설치하고 관련 법제 연구하는 등 제도 도입 마련을 위한 밑작업에 착수했다.

TF팀 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민주(변시 2회) 법무법인 율원 변호사는 “최근 이슈가 된 SK와 LG의 배터리 소송만 하더라도 국내 법원이 아닌 미국 법원에서 다투고 있는 실정”이라며 “특허침해 관련 증거가 편중될 수밖에 없는 국내 사법시스템 보단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증거가 명확히 제시하는 미국 법원을 더 신뢰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디스커버리 제도가 국내 도입될 경우 이러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원의 실체적 진실 발견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에서는 6월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이 대표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이 디스커버리 기능을 일부 수용해 눈길을 끌었다. 개정안에는 △소 제기 전 증거조사 절차 신설 △법원의 제출명령 불응 또는 문서 훼손 시 제재 강화 △문서제출의무자 확대 등 내용이 포함됐다.

이 법안은 완전한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현행 민사소송법 틀 내에서 합리적으로 수용하려는 취지가 엿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변협은 같은 달 성명을 내고 “소 제기 전 증거조사 절차가 신설된 민사소송법 개정안 발의를 적극 환영한다”며 “이를 토대로 재판의 공정성이 보다 효율적으로 확보되는 진정한 의미의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