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 '디스커버리 제도' 연구반 본격 가동

"항소율 낮아져 분쟁 조기 종결에 큰 도움될 것"

변협 4월부터 TF 가동... '디스커버리 자료집' 발간

8일 사법행정자문회의를 주재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 대법원 제공
8일 사법행정자문회의를 주재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 대법원 제공

대법원이 소송 전 양측 당사자들이 증거를 서로 공개하며 쟁점을 정리하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사법행정자문회의(의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지난 8일 개최한 제17차 정기회의에서 디스커버리 도입 여부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관련해서 법원행정처도 '디스커버리제도 연구반'에 참여할 판사와 변호사·법학 교수 10여명을 선발했으며, 이달부터 본격 활동에 돌입했다고 13일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될 경우 하급심이 내실 있게 운영돼 사실심 단계에서 당사자들이 재판에 승복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나아가 대기업과 정부기관 등 '공룡집단'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 개인들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 정보 비대칭과 당사자 불균형 문제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소모적 다툼 줄여 충실한 변론 준비 가능"

디스커버리 제도는 미국 등 영미법(common law) 계수 국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증거개시절차'를 의미한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당사자는 소송 상대방에게 서면 질의를 보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관련된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법원을 통해 제3자에 대한 자료 요청도 가능하다. 만일 당사자가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법원은 해당 내용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등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이처럼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증거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소송 쟁점이 명확해 질 뿐만 아니라 증거자료를 수집·보관하는 기능도 자연스레 이뤄진다.

무엇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개인이 대기업이나 국가 기관을 상대로 소송전을 펼칠 때 큰 힘을 발휘한다. 국내 민사소송에서 입증책임 없는 당사자(주로 피고)는 증거 제출에 매우 소극적이다. 증거가 부족하면 결국 입증책임을 지는 쪽이 패소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증거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자동차 결함 등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제조물 책임 소송에서 개인은 기업·기관의 비협조로 과실책임 입증에 곤란을 겪다 패소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제도가 시행돼 각 당사자가 지닌 증거가 모두 현출되면, 개인도 거대 집단과 대등한 입장에서 다퉈볼 여지가 생긴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보다 충실하게 변론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신(42·변호사시험 6회) 김앤컴퍼니 변호사는 "명확하게 현출된 증거를 확인한 상태에서 변론을 준비할 경우, 소모적인 다툼이 줄어들어 재판이 공전(空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핵심 쟁점과 법리를 중심으로 충실하게 변론을 준비할 수 있으므로 의뢰인의 법익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심 충실화로 항소율·상고율 대폭 낮아질 것"

"대법원까지 간다"

우리나라의 높은 항소율과 상고율은 고질적 병폐 중 하나로 거론된다.

당사자들이 1심과 2심에서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비율이 높을수록 분쟁이 장기화 돼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는 데다, 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돼 1심에서 증거조사가 충실하게 이뤄지면 분쟁의 조기 종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형두(56·사시29회) 법원행정처 차장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인 지난 2019년 '법학평론'에 기고한 논문(새로운 법조양성체제 하에서 미국식 디스커버리의 도입방안)을 통해 "많은 수의 사건들이 1심에서 종결되지 못하고 항소된다는 것은 분쟁의 종국적 해결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항소심을 거치는 사건이 많으면 판사·변호사·법원공무원 등 재판 역량의 투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점점 더 많은 사건들을 항소하는 현상의 핵심 원인은 1심에서 증거 조사가 충분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1심에서 증거 조사를 철저히 하도록 재판 제도를 개선한다면 이러한 악순환 고리를 끊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논문에 따르면 지방법원 합의부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1997년 30.8%였지만 2007년에는 40.6%, 2017년에는 40.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사법연감 통계에 의하면 올해 1심 민사합의부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43%수준이다. 사건 당사자 중 절반 이상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심 문턱을 넘고 있는 셈이다.

변호사 업계 '반색'... 대한변협 디스커버리 TF, 자료집 발간

변호사 업계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추진에 힘을 싣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이종엽)는 지난 3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TF팀'을 설치하고 관련 법제 연구에 주력해왔다. 9월에는 디스커버리 TF팀과 배심제도연구회(회장 박승옥 변호사)가 공동 연구를 집대성해 만든 '디스커버리 제도'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자료집에는 미 연방 민·형사 디스커버리 규정과 뉴욕·캘리포니아·버지니아·플로리다주(州)의 규정·지침,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관련 시사점 등이 일목요연하게 담겼다.

TF팀 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민주(42·변호사시험 2회) 법무법인 율원 변호사는 "최근 이슈가 된 SK와 LG의 배터리 소송만 하더라도 국내 법원이 아닌 미국 법원에서 다투고 있는 실정"이라며 "특허침해 관련 증거가 편중될 수밖에 없는 국내 사법시스템 보다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증거가 명확하게 제시되는 미국 법원을 더 신뢰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디스커버리 제도가 국내 도입될 경우 이러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원의 실체적 진실 발견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디스커버리 제도가 악용될 경우 기업의 핵심 기술이 손쉽게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지점이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특허법 등 개별 법령에 따라 원천 기술에 대한 보호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는 원론적인 차원의 접근"이라며 "디스커버리 제도의 맹점을 악용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유 기술에 대한 열람 제한과 거부권을 일부 허용하는 등 제도 입안 단계에서부터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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