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보다 낮이 길어지고, 약동하는 봄기운과 생명이 넘치는 희망의 춘분(春分) 시점에, 문득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에서 일어나 바다로 되돌아가듯, 저의 육신도 순리에 따라 자연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는 지구가 ‘하나’이듯이, 제 육신을 존재하게 한 ‘인류의식’과 ‘인간정신’만큼은 저의 개별적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영원히 ‘하나’이며, 우리 모두 결국 거기에 합일이 될 것입니다.

재작년 이맘때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4:3:2)이 선고되었고, 2020년 말까지 대체 입법을 마쳐야 했지만, 국회는 아직도 법적 공백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형벌은 최후수단이어야 한다는 법리에는 수긍하지만, 헌법상 태아도 생명권의 주체가 되며, 잉태된 순간부터 생명이 깃든다고 하는 인간정신의 본질에 비추어보면, 태아의 생명보호를 ‘기본권’ 아닌 ‘공익’으로만 취급하고, ‘22주 이내’라는 낙태 가능 기간을 묵인한 헌법재판소의 판시 이유나 그것을 열렬하게 환영하고 박수를 보낸 여성단체의 입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가정과 결혼, 출산에 관한 가치관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 요즘, 신생아 출산율은 역대 최저로 떨어지고, 자살률은 유례없이 높아지고, 이혼·가출 등 가족해체로 인한 결식아동이나 ‘고아 아닌 고아’가 늘고 있으며, 20세가 되어 보육원을 퇴소하게 되면 소액의 정착지원금을 받고 냉혹한 사회경쟁에 곧장 내팽개쳐진다고 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만성적 식량부족을 겪고 있는 북한 사회의 결식아동과 기아 문제는 더더욱 심각한 상황일 게 틀림없습니다.

6.25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이제는 다른 나라를 돕는 국가가 된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죽음의 문화가 퍼져가고, 생명의 위기가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회 전반에 자아 중심적·육신적 경향이 높아지고, 누구든지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다고 하는 헌법정신이 무뎌졌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는 부를 얻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고, 다양한 명예가 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있으며, 행복 또한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죽음에 의해 깨어질 부귀영화는 단지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누림을 추구한다 해도, 합일(合一)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인간정신에 대한 이해나 공감이 누락됐다면, 그 어떤 삶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구름’과 다를 바 없는 신세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 즉 생로병사라는 것은 그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물질보다는 인명(人命)을 소중히 여기는 ‘인본주의’가 우선이라는 성현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해도, 인본주의 정신만 살아 있으면, 누구든지 생명의 순리(順理)에 따라 균형과 조화를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진섭 변호사

서울회·법률사무소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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