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독특한 전시가 열렸다. 한국 근현대 서예전 ‘미술관에 서(書)’는 서예를 미술의 범주로 인정한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전시였다. 유튜브 10만 뷰를 바로 찍었던 이 전시는 배원정 근대미술파트 학예사가 기획한 것이다. 배 학예사는 인터뷰에서 “서예가 회화나 조각 등 다른 장르의 미술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봄으로써 미술관에 ‘서(書)’를 조명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형태의 미술임을 말하고자 한다”며 “전통의 시화일률(詩畵一律)을 계승한 문자추상과 서체추상이 동서양 융합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현대화 되는지를 모색한 전시”라고 밝혔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畫 畫中有詩)’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현대미술에서 전통의 현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추상화의 유행이 서구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미술가들이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민화문자도_출처_월간만화
조선시대 민화문자도_출처_월간만화
김창열, 회귀, 1991_출처_갤러리현대
김창열, 회귀, 1991_출처_갤러리현대

 

최근 뜨거운 열기로 마무리된 서울옥션의 하이라이트는 최근 작고한 물방울 작가 김창열(1929~2021)의 작품들, 그 가운데 문자와 결합한 글자는 마지막 작고전이 된 현대화랑의 ‘더 패스(The Path)’ 전시에서 재조명된 바 있다. 서화(書畵)가 다시금 고개를 들면서 문자추상에 대한 관심이 미술시장에까지 연결된 것이다. “한자는 끝없이 울리고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맨 처음 배운 글자기 때문에 내게 감회가 깊은 천자문은 물방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정신이 담긴 천자문, 도덕경 등이 캔버스의 여백과 어우러진 독창적인 추상미술의 형태인 것이다. 문자는 동양과 서양, 내용과 형식, 구상과 추상을 연결하는 미적토대이자 원형이다. 고개 드는 문자추상과 서예전시 열기의 연계성은 중국국가미술관의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와 LA카운티 라크마미술관의 ‘한국 서예전, Beyond Line’ 그리고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ㄱ의 순간’등의 성공과도 맞아 떨어진다.

남관, 정과 대화, 1978 _출처_갤러리현대
남관, 정과 대화, 1978 _출처_갤러리현대
이응노, 인간추상(왼) 문자추상(오), 1977_출처_이응노미술관
이응노, 인간추상(왼) 문자추상(오), 1977_출처_이응노미술관

이를 반영하듯 민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경주대 정병모 교수는 최근 ‘민화 문자도’의 현대적 해석과 연계된 국제규모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이응노, 이정지, 남관, 김영주 등의 문자추상이 재발견되고 한국적 아방가르드(전위)의 재해석이 요구되는 측면에서 최근 유명 옥션을 통해 거래가 늘어난 서예와 문자추상에 대한 관심 또한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그 반응이 심상치 않다. 감각본위의 서구적 유행만을 좇던 한국미술계에 불고 있는 전통화 바람, 조만간 근대미술가의 서화 작품들이 제 가치를 찾고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 호흡할 날이 멀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안현정 성균관대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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