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여주인공이, 소설 바깥의 ‘소설가’를 찾아가서 자신의 인생을 왜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냐고 따지는 내용의 외국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따져 묻는 ‘소설 속 캐릭터’를 보면서 소설가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 이야기가 기자가 되고 난 후 자주 기억이 납니다.

기자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을 제3자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권력에 대한 감시’와 ‘알 권리 추구’라는 가치를 위해 끼어들어 왔습니다. 성추문이나 비위 혐의에 대한 기사를 쓰고 나면 당사자에게 항의를 받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기사 때문에 상처를 입고 피해를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사회부 경찰 기자부터 시작해 정치부, 또 다시 사회부 법조팀에서 8년차 기자 생활을 보내고 있는 저는 이제 그런 항의에 많이 무뎌졌습니다. ‘개똥벌레’ 노래 가사 속 개똥벌레가 너무 안됐다며 울던 어린 시절의 저는 어디로 갔는지 … 욕설이 담긴 메일에 대해 무감각해진 자신을 보면 가끔 무섭습니다. 하지만 앞서 적은 소설 속 소설가처럼, 언젠가 제가 쓴 기사 때문에 항의를 받고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 생겨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우려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비판 기사를 쓸 때 ‘사람에 대한 예의와 애정은 잊지 말자’고 다짐하곤 합니다. 그래도 어느 쪽에는 분명 미안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제 기사로 피해를 입는 쪽에서 “그러는 기자 너는 얼마나 공익을 우선시하며 살았느냐”나 “그 사람이 되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라고 지적해오면 부끄럽습니다. 이런 성격은 애초에 이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법원을 출입하며 느끼게 된 일이지만, 변호인 등 법조계 분들도 비슷한 일을 겪고는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나 ‘공공의 알 권리’ 같은 공공성을 띠고 있는 기자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한 비판 보도는 계속될 듯 합니다.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말 한 마디 쉽게 내뱉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디 연구기관의 학자들도, 기업가들도 말조심 합니다. (사석에서 말을 잘못해 휴대폰 보안조사를 당한 후 징계를 받았던 전직 공직자 분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상 속에서 그나마 언론이 ‘감시견(Watch Dog)’ 기능이 있어서 권력에 대한 견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도 1787년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언제든 의견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자로서 업무를 하는 동안 짧은 생각으로 상처를 드렸다면 그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채현 TV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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