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유예. 형사사건 재판정에서 듣기 어려운 단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죄가 가벼운 범죄인에 대해 형의 선고를 일정 기간 미루는 일’ 형사 재판에서 죄질이 가벼운 피고인은 찾기 어렵다. 한 변호사가 그랬다. “검찰은 모든 사건을 기소하지 않는다. 죄질이 극히 불량한 사람들만 법정에 세운다.”

이달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선고유예란 단어를 들었다. 피고인은 올해 28살 된 남성이었다. 당시 직업은 택배기사, 죄목은 건조물침입이었다. 작년 8월 한 미용실에 허락 없이 들어가 택배 상자를 두고 나왔다는 게 검찰의 공소사실이었다. 당초 남성은 미용실 측이 요구한 합의금 3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약식기소됐다. 그리고 벌금 20만 원을 선고받았다. 남성은 이 일로 일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검찰은 “형이 너무 가볍다”며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공판 당일 판사가 물었다. “혐의 다 인정하십니까?” 남성이 답했다. “네.” 판사가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피고인도 위법성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피해자에게 사과 의사를 밝혔는데도 3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합의하지 못한 점, 절취 등 다른 목적으로 미용실에 침입했다고 볼 자료가 없는 점을 고려해 형량을 정했다.” 판사의 주문이 이어졌다. “검사의 정식재판 청구이긴 하나 약식명령보다 경한 선고유예를 선고한다.”

시간을 일주일 전으로 돌려본다. 첫 공판이 열린 날이다. 당시도 남성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했다. 판사가 물었다. “얘기를 잘해서 원만히 해결하면 될 문제인데 미용실은 왜 고소까지 했나요?” 남성이 대답했다. “그게… 거기가 깨끗하게 운영되는 곳인데 제가 발자국을 남겨서 기분이 나쁘다고 한 걸 들었습니다.” 남성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그는 최초 미용실 현관이 잠겨있자 뒷문으로 들어가 물품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피해자로부터 전화가 와 “현관 비밀 번호를 알려줄테니 물건을 앞에 두고 가라.”는 주문을 받고 걸음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발자국이 남겨졌다고 한다. 판사도 이상하다는듯 서류를 넘겼다. “발자국이 크게 난 것도 아니네요.” 변론은 그걸로 종결됐다.

선고 뒤 판사는 남성에게 “선고유예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다정했다. 온도가 느껴졌다. 사법 불신의 시대다. 전·현직 대법원장의 사정만 봐도 그렇다. 사법부를 향한 국민의 신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허나 이 공판을 지켜보며 회복의 길도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시시한 약자를 시시한 강자로부터 보호하는 법관이 많아진다면 법원에 대한 시선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조성필 아시아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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