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원의 이야기다. 손바닥으로 후배 직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잘하자”며 손바닥으로 ‘툭’ 건드렸다. 격려이자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얼마 뒤 문제가 됐다. 후배 직원이 폭행 혐의로 그를 고소했다. 그는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정확히는 황당해했다. “이게 어떻게 폭행이 되느냐”고 했다. 부인하고 또 부인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후배 직원의 머리를 건드린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가해자 시점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또 하나의 가해자 시점이다. 가해자가 조사에서 말했다. “말을 듣지 않을 때 손찌검을 한 적은 있지만 뼈가 부러질 만큼 때린 적은 없다” 그런데 피해자는 췌장이 끊어졌다. 소장과 대장의 장간막도 여러 곳 찢어졌다. 신체 곳곳에 멍이 있었고 골절 흔적도 발견됐다. 피해자는 생후 16개월 된 정인이다. 가해자는 그의 양모다. 정인이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가해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훈육 차원의 체벌이었다고 했다. 학대는 아니었다고 했다. 피해자의 시점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

형사 사건에서 피해자 입장을 헤아리는 가해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 피해자다움을 주장한다. “피해자가 맞을 짓을 했다”는 식이다. 정인이 양모도 “아이가 진상”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정인이가 손찌검을 당할 만한 진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진상인 정인이가 멀쩡한 나를 가해자로 만들었다”는 논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방어권 행사였나. 그랬다면 틀렸다. 말 없는 아이 진상 만들어 행사하라고 있는 방어권이 아니다. 그냥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결여된거다. 성범죄 사건이었다면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다.

과거 누군가 바람의 기준을 말했다. ‘상대방이 바람이라고 느끼면 바람’이라고 했다. 당사자가 “아무 감정 없다” ”밥만 먹었을 뿐”이라고 변명해도 소용 없단다. 피해자 중심의 접근법이다. 정말 아니라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빌미를 제공했으니 산 오해다. 행실을 돌아보고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게 우선이다. 해명으로 이어질 방어권 행사는 이후의 문제다. 이런 걸 우리는 순리(順理)라 한다.

아동학대 사건은 언제나 슬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른으로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데 먹먹함이 따른다. 정인이 학대 사건은 아이를 진상으로 치부하는 어른을 보자니 더 서글프다. 아이를 두 번 죽이는 거다. 정인이 사건은 지난 13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첫 재판이 열렸다. 1심이 끝나도 항소심, 상고심으로 이어질 재판이다. 감히 유무죄를 예단할 순 없겠다. 다만 양모가 정인이를 학대한 정황과 증거는 차고 넘친다. 정인이가 남기고 떠난 상처가 말하고 있다. 판단은 법원이 한다. 법원의 시간이다. 피해자 중심의 접근과 순리에 입각한 판결을 바라본다.

 

 

 

/조성필 아시아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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