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타면서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릴 때는 손이 가지 않던 책을 이번에 읽게 되었다. 나같이 자극적이고 선명한 서사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조금 김이 샐 수도 있다. 조마조마하며 여러 챕터를 훑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전쟁의 ‘참상’은 피비린내 나는 묘사로 떠오르지 않았다. 덤덤하게 40년 전보다 40년도 더 된 과거를 조금씩 드러내는 목소리들만 남았다.

그건 글자가 아닌 음성이었고,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불에 그을려 사라질 수 있는 핏자국이 아니라 한때 얼어붙었더라도 언제든 다시 흘러내리는 물줄기 같은 것이었다. 눈물이었고 식은땀이었고, 다른 생명체로 이어지는 양수 같은 것이었다. 전쟁이란 서사는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어떤 위압도 될 수 없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서사는 달랐다. 여성이란 존재를 기억하고 싶은대로 편집한 전쟁의 승리는 반쪽자리여서 그렇게 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나보다.

소련군 2000만 명이 희생된 승리였지만 우리는 위대한 미국의 함대만 떠올린다. 소련군 안에서도 기억되지 못했던 여군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소년병’이란 단어에는 없는 빨간 줄이 ‘소녀병’이란 단어엔 그어지는 것을 보면서 80년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은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싶어 한다. 전쟁이란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여성은 언제까지나 생명을 살려내고 길러내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죽여서까지 무언가를 손에 넣거나, 완전한 존재로 충분히 성장하는 일은 여성의 몫이 아니다.

전쟁에서 조금이나마 역할을 하는 여성은 새하얀 앞치마를 두룬 나이팅게일로 묘사된다. 하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에서 바닥을 기어 참호 속에 널부러진 부상병을 꺼내 구호 천막으로 돌아오는 일을 흰색 치마를 입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일찍 전쟁에 나와 여성의 속옷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는 소녀병들이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피를 부상당한 것이라 착각한 여군도 있었다. 부대를 위해 걸핏하면 울어대는 자신의 갓난아이를 물에 담근 어머니 병사도 있었다. 최전선엔 나서지 않았다고? 어떤 군인보다 많은 적군을 쏘아 맞춰 훈장을 받은 나이 어린 소녀도 대전차를 몰던 여군도 있었다. 썩은 사지를 잘라내 품에 안아 옮기거나 터진 내장을 바로잡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 않았던 것도, 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던 모습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편집되었을까.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20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고, 노벨문학상을 타기까지 또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계속해서 인터뷰 하고, 글감으로 다듬고, 문장을 써내려가야 중요해진다. 나의 글도 전쟁터에서 싸우는 여성의 이야기를 좀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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