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 올해 오십이 되니, 중고교 동창 중에는 할아버지가 된 친구도 있습니다. 아들이 벌써 사업하는 친구도 있고, 딸이 대학생인 친구도 있습니다. 얼마 전 중학교 동창이 의뢰한 손배 사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 타지 대학에 간 딸이 자취방에서 동기 남학생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사건입니다. 제 막내딸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데, 친구와 원고를 상담하면서 또 변론하면서 험한 세상을 살아야 할 딸 걱정이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후배 변호사 소개로 강간미수 피고인 변호를 맡았습니다. (신상 공개가 될 수 있어 자제하겠지만) 피고인이 술에 만취해 대학 동기생을 범하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입니다. 피고인은 사건 당일 5차에 걸쳐 소주 7, 8병을 마신 상태로 소위 필름이 끊겼다고 합니다. 제 경험상 증거에 나타난 음주량으로 보아 피고인 말처럼 간밤 기억이 전혀 없을 가능성도 이해됩니다.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현재 항소 중인 피고인이 참 안타깝습니다. 피고인을 보면서 사춘기 두 아들을 둔 아비로서 행여 유사한 과오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납니다. 이는 피해자 여대생의 충격과 슬픔에 대한 측은지심과는 별개의 감정입니다.

자백하고 증거가 명확한 강간미수 사건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된 관심사는 피해변제와 피해자의 용서 및 합의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합의는 피해자의 자유의사 영역이므로, 오롯이 피해자의 처분에 맡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합의에 관한 한 피고인과 변호인은 본질적으로 무력합니다. 더구나 근자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오직 피해자 (국선)대리인을 통해서만 사죄 의사를 전달하고 합의 의사를 전달받게 되니 그 막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행여 피해자 대리인이 세상사에 치여 저처럼 선악(善惡)과 피아(彼我)에 관한 회색주의자 성향이라면, 피해자를 진지하게 위로하면서도 합의 여부에 관한 신중한 조언을 기대해 볼 수도 있으련만, 혹여 피해자 대리인이 추상(秋霜)과 같은 정의관념으로 무장한 원칙주의자 성향이라면 마치 변호인 스스로가 천벌 받을 죄인과도 같은 심정이 됩니다.

피해자 용서와 합의를 득하지 못하면 자연히 피고인과 변호인은 공탁을 도모하게 됩니다. 공탁법 제4조는 공탁절차를 대법원규칙에 위임하고, 공탁규칙 제20조는 피공탁자의 성명, 주소, 주민번호를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규정합니다. 요새 형사기록에서 피해자 개인정보는 성명마저 가명처리 하는 등 익명화하고 있어, 결국 공탁하려는 자는 주민등록법 제29조에 근거해 주민등록표 열람신청을 하여야 합니다. 재판부는 허부 결정에 앞서 피해자에게 그 의사를 묻는 것으로 압니다. 결국 돌고돌아 피고인의 공탁 긍부도 피해자 처분에 맡겨져 있는 형국입니다.

용서와 합의는 두말할 것 없이 피해자의 처분 영역이고, 공탁금 수령 여부도 피해자 의사에 따름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형사 피고인이 사죄와 용서를 구하고, 그것이 실패하였을 경우 의지할 ‘공탁 그 자체’까지 피해자가 결정하는 것이 온당한가는 의문이 듭니다. 피고인 공탁자는 피해자 비(非)개인정보로써 공탁하여 이를 양형자료로 제출하고, 이를 수령할 것인가 아닌가를 피해자가 결정하는 것이 피해자 정보 보호에 반하지 않으면서도, 피고인 측에 양형자료 제출 기회를 줄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김상훈 변호사

광주회·법무법인 빛고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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